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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깨어나는 투쟁

고요한 탑정호처럼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걷고 있는 길은 어느 수준에서 머물러 있어도 사는 데는 별다른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이 본성이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매번 투쟁이 아닌 투쟁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가고 싶은 길은 있지만 현실과 타협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길도 있다. 시간과 가용한 자원이 한정적인 가운데 매년 똑같지만 의미 없는 일이 반복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나머지 여력을 짜내서 현재 필자를 둘러싸고 있는 알을 깨야하는 과제가 스스로에게 주어진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만족을 하면서 산다. 더 나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 굳이 알을 깨는 과정은 아니더라도 변화는 막 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어야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시도한다. 자신에 의해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한계의 알을 깨는 것을 보는 것은 스스로에게 많은 만족감을 준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방법과 표현은 달랐지만 필자 역시 그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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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논리적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탑정호처럼 살아 있는 생물과 이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통틀어 생태계라고 한다. 깊숙이 들어가 봐야 그들의 생존 방식이 이해가 되겠지만 경쟁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잠재 능력을 찾아내 발현시킬 수 있는 파괴적인 경쟁을 통해 공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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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깨지 못하면 몸이 커졌는데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처럼 괴롭게 된다. 물론 몸이 안 커졌으면 굳이 알을 깨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대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의 크기만큼만 사는 것이다. 절실하게 알을 깨고 싶다는 의지와 세상으로 한 발자국 더 전진하고 싶다는 강력함이 없으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걸으면서 백제군사박물관과 대명산 정상, 생태공원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의 이정표는 결국 이곳까지 걸어와야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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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해 누군가가 극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정말 보람 있고 가슴이 벅찬 일이다. 그 행동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던 되지 않든 간에 그 자체로도 동력원이 된다. 알은 지금 자신의 세계를 규정하는 경계다. 알을 깨는 일은 주변을 흔들고 때론 충격과 원치 않는 고통이 수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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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저물어갈 때 위의 사물을 그림자처럼 그려내는 반영은 짙어진다. 필자도 느끼지만 현실적으로 매번 알에서 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포기할 것은 포기한다. 가진 자원이나 시간에서 에너지를 빼내서 집중한다. 알에서 깨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이 즐기는 상당수의 것들은 과감히 포기하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미 어릴 때부터 성장의 카타르시스가 주는 쾌감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간다. 지나치게 그 순간이 편안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스스로에 대한 판결자가 되지 못한 채 변화는 없다.


알을 해본 적이 없다면 그 세계가 보여주는 시야 속에만 갇히게 된다. 갇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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