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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22. 2020

결의와 결단

대전 이시직 공 정려각

나라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살아가면서 굳게 마음을 먹고 뜻을 정해 행동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실행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들이 많다. 옛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맞고 틀림을 떠나서 자신이 소신처럼 생각했던 것을 추진하며 목숨까지 버렸던 사람들이 적지가 않았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하며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전국의 수많은 유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회덕의 우암 송시열과 논산의 사계 김장생이 대표적이다. 

김장생에게 수학한 사람 중 이시직이라는 사람이 있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사축서 별제가 되며 조정에 나아간다. 그는 10세에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웠으며, 뒤에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사람이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와 회덕의 숭현사(崇賢祠)의 별사에 제향 되었는데 그의 정려각은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시직은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는데 그때 인절미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1635년 병조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장령·세자시강원필선 등과 장악원정·사복시정·봉상시정 등을 역임하며 조정의 주요 요직을 지내던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 시주부 송시영(宋時榮)이 먼저 자결하였을 때 같이 자결한다. 

  ()인 이시직의 묘갈은  () 동춘당 ()   () () . 이시직은 국난을 당해 절의로써 사론(士論)을 세우고 충과 의를 드러내니 그의 이름은 해와 달처럼 천지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이곳 회덕에 정려 된 이유는 이시직이 척족이기도 한 서인의 권력자 이귀, 이정귀와 교류하며 출사 이후 서울에서 살았다.  조부 이정현이 송준길의 증조부 송세영 사위가 되는 혼인 관계로 회덕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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