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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5. 2020

의병이 숲을 이룬 곳

마산 9경의 의림사

고통이 없는 사후세계로 가는 길이 돈으로 결정되고 현세에서 지은 죄도 사할 수 있다는 면죄부가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본질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돈을 쓰고 진실을 숨길 수 있으며 얼마든지 포장할 수 있는 이단들이 적지 않다. 현실 속에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층은 미래를 위한 노력보다 잡힐 것 같은 허상 세계에 집착하고 있다. 만약 현실세계에서 낸 돈만큼 천국에 가까워진다면 생각하는 천국은 현실과 다른 것이 없는 지옥일 것이다. 

창원에 자리한 사찰 중 의림사는 초기에 창건하였을 때의 이름과 다르게 바뀌어 유지되고 있다. 여항산(餘航山) 자락에 자리 잡아 예로부터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즐겨 찾는 조용한 휴식처인 의림사는 688년(신문왕 8) 위웅 대사(爲雄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신문왕이 빈번한 왜구의 약탈 행위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물리치려는 원력으로 창건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봉국사(奉國寺)라 이름이 붙여졌다. 

개구리가 깨어나고 나서 이제 날이 확실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의림사에도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오고 있는데 창원은 지역적으로 일본과 가까워서 왜구의 침략이 많았던 곳이다.  봉곡사도 왜구를 물리치려는 바람에서 붙여진 것이지만 이후에 이름이 바뀐 의림사는 조선 초기까지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로 선종(禪宗)에 속했다고 한다. 

울창한 상록수를 배경으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의 넓은 경내에는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인 의림사 3층 석탑을 비롯한 당간지주와 수백 년의 수령을 가진 거대한 모과나무가 남아 있다.  의림사라는 사찰명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발발로 전 국토가 왜구의 발아래 유린되자, 당시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1,500여 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자 인근 각지에서 의병이 숲[義林]처럼 모여들었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지금의 의림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조선초에도 규모를 유지하던 이곳의 사찰 규모는 의림사 도형에도 나와 있다고 하는데 지도에는 법당, 노전(爐殿),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국사영당(國師影堂), 청원루(淸遠樓), 영원당(永元堂), 금장각(金藏閣), 북암(北庵), 남암(南庵) 등이 있다. 그 이전에 세웠던 보광전(普光殿), 관음전(觀音殿), 천왕문(天王門), 청하당(淸霞堂), 백하당(白霞堂), 만월당(滿月堂), 망월암(望月庵), 동암(東庵), 해행당(解行堂), 미타전(彌陀殿) 등도 나와 있다. 상당히 큰 도량인 것을 알 수 있다. 

큰 도량을 유지하여 오던 의림사의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은 한국전쟁 때다.  서부전선의 격렬한 교전이 바로 의림사를 기준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의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병대가 진동리 지구에서 접전을 하며 북한군을 막아낸 진동리 지구 전첩비가 있어 그 격렬함을 알리고 있다. 

의림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낮은 당간지주가 있는데 각각 2쌍씩 경내 염불당 앞과 경외지에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당(幢)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을 말한다. 국가적인 재난 아래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국난에서 일어나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한 의병의 발걸음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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