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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5. 2020

재실 (齋室)

논산 윤황 선생 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나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 있는 경우가 많다. 뼈대가 있는 문중이라면 벌초나 제사등의 준비를 직접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은 묘지기나 산지기가 있어서 묘소·위토·종산·선산·재실 등의 관리를 했던 것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거나 문중관념·동족관념이 희박하여지고 제례 참가율이 낮아짐에 따라 예전보다는 종속되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관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문의 재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유력 가문이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가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윤순거·윤문거·윤선거·윤증 등 호서 유림의 큰 줄기를 이룬 이들이 모두 이 가계에서 나왔는데 파평윤씨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윤황 선생은 재실이 있고 그 가문의 후손들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윤황 선생의 묘의 아래에는 윤황 선생 재실이 있으며 조선 현종 6년(1665)에 안채를 짓고 조선 숙종 21년(1695) 문간채, 서재, 동재를 건축하여 지금도 남아 있다. 

선조, 광해군에 이어 인조까지 조선은 큰 전쟁에 휩싸여 백성들은 더 살기 어려워졌다.  광해군대에 시골에 은거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에 대사간에 이르렀는데 윤황은 백성을 위한 빈곤대책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진휼 사업은 진휼청을 통해 진행이 되었는데 이는 지방관과 관찰사의 진휼 활동을 지원하고 감시 통제하는 구조였다. 

재실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중부 지방 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400여 년의 오랜 세월에도 그 형태를 잘 유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소를 둘러보았으니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재실의 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재실이 지어지는 것의 기본에는 효라는 개념이 포함이 되어 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효를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단순히 가족윤리 차원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원리였다. 부모의 상이 있다면 혼담이 시작된 상태라도 결혼은 그 3년 후에나 가능하였다. 제사를 올리는 것의 효는 지배 이데올로기 그 자체였다. 

논산에서 멀지 않은 현재의 금산군(당시 진산군)에서 가톨릭 신자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진산군은 군에서 강등되어 5년간 현으로 되었으며 진산군의 수령은 주민의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조선시대에 중앙관리로서 부모의 병환이 있는 경우 거리에 따라 70일에서 30일까지의 휴가를 주고, 7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사람은 한 아들을, 80세 이상이면 두 아들을 90세 이상이면 모든 아들을 고향에 보내어 부모를 봉양하도록 했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한 윤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는데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난 뒤 생을 마친 후 이곳에 묻힌다. 


논산 윤황 선생 재실은 문화재자료 제391호 지정이 되어 있으며 간결한 납도리 집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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