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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6. 2020

신도비 (神道碑)

옥천의 조헌의 묘와 신도비

한 사람의 일생이 돌에 새겨진다고 하면 그 자체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굳이 남기기 위해 유명 여행지의 자연석에다가 새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다. 아무튼 지금은 예전과 달리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을 경우나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누렸을 경우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오래전에 세워진 신도비의 신도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한반도에 자리한 국가들 역시 묘비 혹은 신도비를 세우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조선시대에 특히 신도비가 많이 세워졌는데 사대부나 생전에 세운 공로나 인품을 기록하여 비석을 크게 세웠다. 옥천에 세워진 신도비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우던 중 전사한 조헌의 묘의 길을 안내하는 신도비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조헌은 평생을 직언으로 일관하면서 살았다. 자신이 배운 대로 뜻한 대로 살던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에서 왜군을 물리쳤는데 기세를 몰아 지금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조헌 신도비를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오면 조헌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과 그를 모신 사당이 나온다. 조헌은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菡)에게도 배웠다. 조헌은 충청북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1582년 보은현감으로 근무할 당시 1584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옥천의 밤티(栗峙)에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조헌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여 명이 한꺼번에 전사한 전투인 칠백의총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였다. 금산에 전사한 조헌은 이후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그의 묘소로 걸어서 올라가 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 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 방비책을 올렸으나 묵살되었다. 

금산전투의 승병장인 영규대사의 묘는 공주에 있고 조헌은 옥천에 있다. 묘역은 약 100평으로 상석·문인석·망주석이 있으며, 봉분 앞 좌·우에 각각 묘비가 있는데 묘소는 마을 뒷산 중턱의 무성한 노송 사이에 위치해 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된 재실이다. 1812년(순조 12)에 건립된 영모재는 1970년에 다시 고쳐 세웠다.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앞면 5칸, 측면 2칸 반의 크기로 10칸이 약간 넘는 규모로 안방, 윗방, 건넌방,  대청, 부엌을 갖추고 있으며 옥천 지역에 자리한 조금은 특이한 가옥 구조의 형태다. 

받아들이지 않음에도 계속 직언을 하고 바뀌기를 바라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결국 조헌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발생하자 의병장으로 일어섰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묘는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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