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Mar 13. 2020

사람의 자격

주희(朱熹)만을 모신 음성 태교사 

전문분야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보통 자격이 부여가 된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현명하게 대응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자격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부모, 남편, 아내 등 살아가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하게 되지만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배움 등의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시험이라던가 명예가 있는 누군가에 의해 자격이 부여되기도 한다. 서원 철폐령에 의해 전국에 자리한 많은 서원이 없어졌지만 서원이 운영이 될 때 입원 생의 자격 규정 역시 있었다. 

최초의 서원이었던 백운동서원의 입원생의 자격은 선비로서 태학과 같이 생원, 진사를 우선으로 하고 다음으로 초시 입격자로 한다. 입격의 자격조건이 되지 못하였더라도 하나의 마음으로 향학하고 조행이 있는 자는 유사가 사문에게 아뢰어 받아들였다. 서원의 입교 자격조차 그러했는데 서원을 건립하는 것은 더 까다로웠다. 음성에 있는 태교사라는 사당은 초기에는 문곡서원으로 창건한 곳이었다. 

태교사는 안동이나 경북, 서천등의 대표적인 서원의 큰 규모는 아니며 마치 향교와 사당의 모습이 적당하게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의 공간이다.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하였던 선비 주응동은 문공 주희(朱憙)의 26대손으로 청빈하였으나 서원을 건립한 자격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림회의(士林會議)를 통하여 서류를 관아에 제출하여, 순영(巡營)으로부터 당우를 건축하라는 단자(單子)를 받아 1856년(철종 7)에 주응동은 안성에 사는 김문웅으로부터 문공 주희(朱憙)의 영정을 기증받아 주씨 문중에 사당을 짓고 서원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음성향토문화의 정보에서는 철종대라고 되어 있지만 직접 가서 안내판에서 본 기록에는 영조20년(1744)이라고 되어 있었다. 

우선 안내판에 있는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앞에서 보면 재실로 사용되는 강당이 있으며 그 뒤로 오면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 건물의 건축 스타일이 조금 독특해 보였다.  한 칸 반이라는 측면의 크기는 기둥을 반칸 앞으로 내어놓은 형태였다. 즉 한 칸 반이긴 하지만 결국 한 칸의 공간 확보만 한셈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고종 30) 다시 재건되어 사당의 명칭을 태교사(泰喬祠)라 하였다. 여느 사당과 달리 이 사당은 주희(朱熹·1130 ~ 1200) 한 명만을 모시고 있다. 따라서 주희의 생일인 음력 9월 15일에만 제사를 올리고 있다.

태교사의 안쪽으로는 가구수는 적지만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주응동이 모신 주희라는 사람은 자신만의 철학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주희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고위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어떠한 자리에 있거나 지역에서 살던간에 사람의 자격은 품격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수양에 달려 있을 듯하다. 서원 건립의 자격은 없었지만 주응동이 살던 곳의 사람들은 그의 자격을 인정해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서부 방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