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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2. 2020

서부 방어

창원 진동리지구 전첩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선제공격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전격전을 통해 남한의 모든 영역을 확보하려고 했다. 북한군의 목표는 미군이나 다른 국가의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부산까지 점령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암암리에 무기를 제공했던 소련은 미국 때문에 대놓고 참전할 수는 없는 입장에서 무기와 군인 수에서 열세였던 국군을 북한군은 전격전으로 밀어버렸다. 이미 독일이  1939년의 대(對) 폴란드전에서 시험한 결과, 전격전이 지상과 공중 전투의 이점을 결합하여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군은 당시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무기와 군대의 열세 속에 낙동강 방어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서부전선에서 무너지면 교두보를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일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저항에 막힌 북한군은 제6사단을 서부전선에 배치하여  서해 방면의 국군을 추격하면서 목포와 여수항을 점령하고 마산을 공격하고 우회 기동을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했었다. 빠른 전격전은 효율도 좋지만 문제는 병참선이 얇아진다는데 있다. 서부전선을 공격하려는 북한군의 전략을 파악한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 상의 상주 남쪽에서 방어 중인 미 제25사단을 마산 방면으로 이동시킨다. 

비교적 서부 방어선이 약하다고 생각했던 서부전선을 공격하던 북한군은 초기 공격 시 미 제25사단 제27연대본부와 체크 대대에 의해 전선을 물리게 된다. 이어 이곳 진동리 지구의 방어를 위해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해병대가 배치되어 북한군 제6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진동리 지구의 승전을 기념하며 이곳에는 해병대의 전투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전투장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전적비도 만들어졌다. 이때 해병대를 이끈 김성은 부대는 전 장병이 일계급씩 특진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의 성공적인 구축과 서부전선을 지켜내면서 전격전으로 병참선이 얇아진 북한군의 약점을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으며 반격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전격전은 한 곳에 집결된 화력을 이용하여 기술적으로 통합된 공격을 가함으로써 방어를 통합할 수 있는 적군의 능력을 마비시키고, 이 마비상태를 이용하여 적의 후방으로 침투, 적군의 통신과 행정체계를 전체적으로 무너뜨리는 데 있다. 

서부전선이 뚫렸다면 부산과 경남을 기반으로 만들어두었던 교두보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북리(城北里)는 지금 진동리의 성산(城山) 마을의 옛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진동리는 지금의 마산 등이 발전하기 전에 주요 거점으로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동리지구 전승은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 올해로 70주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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