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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3. 2020

주거공간

윤황 선생의 종가를 찾아서

사람들에게 집이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집이 있어야 살 수 있고 적당한 공간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집이라는 공간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만 집 자체를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 짓기의 철학을 담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따뜻한 건축 색이 들어간 고택을 탐방하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 다닐 때 아파트나 주택의 설계도를 그려본 적이 있는 경험 덕분에 각각 구성요소의 의미를 알 고 있다.

양반이 모여사는 곳으로 유명한 안동 같은 곳을 가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연락 없이 가서 고택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충청남도에 자리한 대부분의 고택은 열려 있다. 논산도 백일헌 고택이 담장이 있지만 열려 있으며 파평 윤 씨가 살았던 대부분의 고택은 담장도 없이 그냥 개방되어 있어서 좋다. 윤황 선생 고택은 그의 7대손인 윤정진이 영조 때 이곳으로 옮겨서 종가로 내려오는 집이다. 파평 윤 씨가 거주했던 논산의 고택들은 대부분 이렇게 개방이 되어 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고택은 서양의 주택처럼 대칭적이지 않고 비대칭적으로 건물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 건물의 배치는 루빈의 항아리라고 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항아리로 보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착시 현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건물과 땅이 되는 외부 공간의 적절한 배치가 중요하다. 이곳은 연지인 것 같은데 아직 봄꽃이 만개하지 않아서 그 형상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전면에 자리한 상랑채와 안쪽으로 돌아서 가면 나오는 안채로 구성이 되어 있다. 옆으로 더 올라가면 사당이 나오는데 이 사당 안에는 어제시 현판이 달려 있는데 이 어제시는 바로 정조가 내렸다. 1798년 척화의 공을 인정받으면서 부조지전의 은전을 받았을 때 같이 하사 받은 것이다.  

윤황 선생의 종가였던 만큼 더 많은 건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은 일부 건물이 사라지고 조금은 시원시원하지만 너른 땅에 다른 용도의 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당의 건물은 정면 3칸의 건물로 윤황이 척화를 하면서 조선을 지키려 했던 그 정신이 남겨진 곳이기도 하다.

위에서 올라서 보면 안채의 건물과 저 건너편에 사랑채가 보인다. 종가로서 후손들이 살았던 안채는 지금 모두 이사를 가서 비어 있는 상태이다.  안채의 왼쪽 두 칸에는 판장합문이 달려 있으며 뒤로 돌아가서 보면 판문 아래로 툇마루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파트라는 공간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주거공간은 대부분 획일화되어 있다. 주거공간보다 환경 반경이나 대중교통이 어떻게 연계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옛사람들이 중요시했던 툇마루의 높낮이 조절에서 오는 리듬감, 목재가 주는 부드러움 등이 잘 살아 있는 곳이다.  이 가옥의 전체 배치는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자리를 잡았는데 현재 충청남도 시도문화재 제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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