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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23. 2020

정치 (政治)

정치인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

코로나 19에 대처하는 국민의 자세를 보면서 정치에도 희망이 있음을 보았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만연해 있는 과거의 적폐와 폭력적인 그들의 성향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잘못된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뽑아주는 유권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들의 행태와 행적들을 보면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일부 공통점을 찾아냈다.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상당히 우매하고 탐욕적이며 자신이 무엇이 잘못된 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앞으로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매하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인지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매하고 탐욕스러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인지 아직 역학조사를 하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문제는 언론이 이들을 잘 포장해주는 데 있다. 왜? 검사나 언론인 출신들이 현명하고 똑똑하며 올바른 행보를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직업으로 그걸 선택했을 뿐이고 잘 포장되어야 신뢰를 줄 수 있기에 언론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TV에 나온 그들의 모습을 보고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가까이서 그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 면밀한 내면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포장된 모습을 볼뿐이다. 물론 일부의 사람은 굳이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그 속성을 알 수도 있지만 그건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통한 통찰력을 길러야 가능하다. 


검사나 판사 혹은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들도 생각보다 많다.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법조문의 해석과 그것에 맞는 주장을 글로 풀어내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지 그들이 정치에 적합한 것과 전혀 연관이 없다. 그렇지만 성공이 우선시되는 한국사회에서 그들에게 과도한 무게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귀류법에 근거하여 증명을 했었는데 이것은 위대한 물리학자였던 닐스 보어가 던진 유명한 경구로 바꾸어 보자. 그는 "위대한 아이디어의 역은 반드시 위대한 아이디어다." 이게 뭔 소리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해석은 뒤로 하고 보어의 주장은 모순이며 독단일 뿐이다. 역명제를 보면 "위대한 아이디어의 역은 반드시 위대한 아이디어가 아니다"로 결론을 내는 것이 귀류법의 핵심이다. 


즉 "괜찮은 정치인의 역은 반드시 괜찮은 정치인이 아닌 것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싶어도 한국사회는 정치인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어주었기에 외면을 할 수가 없다. 사실 그들은 국민이 표를 줄 때를 제외하고 정치인들에게 관심을 안 가졌으면 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혐오할만한 행동을 하고 선동하고 편 가르기를 즐겨하며 혐오하며 멀어지기를 바란다. 권한은 과도하게 부여되었으나 책임은 너무 가볍게 지우고 있다. 


청년층에서 정치인들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정치인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청년들이라고 해서 생각이 젊지도 않고 오히려 나이가 들은 사람들보다 더 왜곡되고 더 편향적인 사람들이 많다. 젊은 피를 수혈하면 정치가 괜찮아지리라 생각하는 정치계의 생각조차 고루하고 우매하기까지 하다. 


온갖 혐오와 왜곡된 정보가 난무하고 언론은 페이지뷰나 자사의 이득을 위해 기레기 짓들을 할 때 독버섯은 사회의 곳곳에서 자라난다. 최근 n번방의 사건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드러난 벗방(벗는 방송)의 민낯을 보면서 사회가 약자에게 어떤 칼질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왜?... 이성의 벗는 모습이나 가학적인 것들을 돈 주고 보는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별풍선을 많이 쏜사람을 회장이라고 우상시한다는 것을 보면서 이해는 할 수는 있었지만 납득이 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이해는 자본 우상 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경배 부분이다.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문구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책에서 각주를 표시해서 네 이웃(같은 종교를 믿으면서 돈을 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 19가 특정 종교와 이단을 부각하고 있다. 물론 긍정적으로 부각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위기를 초래한다는 내용이 상당수다. 


이 모든 것이 정치가 맑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의 상당히 중요한 행보를 결정하는 정치인들이 바로 서지 않았던 것이다. 국민들의 수준에 비해 정치인들의 수준은 한참 아래에 머물러 있다. 일반적으로 생업을 뒤로하고 상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외면을 하면 우리는 왜곡된 한국사회의 문제를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고 사회적 약자나 여성을 마치 상품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사람들의 속성은 기사의 댓글로도 만나게 된다. 동남아 국가들 베트남 등을 특정해서 왜곡하는 기사의 댓글을 보면 감히?... 그런 나라 따위 같은 맥락을 읽을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 혹은 중국의 기사에는 그런 성향을 볼 수 없었다. 언론에서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의 코로나 19의 확산이나 사망자는 희한하게 객관적으로 쓰고 있다. 


야당 여당 가릴 것 없이 요지경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다. 혼탁한 선거판이지만 그 선거판을 뒤엎어버릴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이다. 어디로 갈지 모를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가만히 멈추어 서서 보면 된다. 마음이 조급해서 어딘가로 휩쓸려가면 결국 선택의 기회는 줄어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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