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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23. 2020

마을 탐방

강경 옥녀봉 아랫사람들

마을단위로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은 촌락이라고 한다. 지금처럼 아파트 단위의 생활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 보통 마을에서 어떤 의견이나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를 도와주기도 하면서 살았다. 코로나 19로 인해 마을단위의 모임이 자제가 되고 일정기간 몸은 멀리 마음만은 가깝게 지내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다. 가옥의 밀집도에 따라서는 집촌(集村)과 산촌(散村)이 구분되는데  촌락은 특정한 명칭을 가지고 있어서 그 촌락의 이름을 지칭함으로써 그 촌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 

보통 마을의 이름은 그 지역에 자리한 오래된 향교나 지역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강경의 낮은 산이지만 옥녀봉에 올라서면 강경의 시내와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노을빛 물드는 옥녀봉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생계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생산과 분배를 공동으로 하거나, 협동 관행이 철저하게 지켜질 때에는 응집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강경은 오래된 장터가 있기도 했지만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해주는 큰 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전됨에 따라 농촌·산촌·어촌의 생산구조도 크게 변화하였는데 강경 역시 변화를 겪으면서 근대의 건물들의 흔적만 곳곳에 남기고 있다. 

종교의 역할은 때론 맹목적인 믿음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는 천황이라는 정신적인 구심점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참배시켰는데 1924년 강경 공립 보통학교의 김복희 선생과 학생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강경 성결교회의 신사들 역시 거부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토마스 선교사가 우연하게 이곳에 왔다가 변을 당했는데 미국으로 추방된 토마스 선교사는 위로금과 미국 교민들의 후원금을 강경으로 전달하였는데 그때 지금의 성결교회 예배당이 세워지게 된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예배당 내부는 잠정적으로 폐쇄가 되었다. 

논산은 전라도를 배경으로 후백제를 세우려고 했던 견훤에게는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백제 사비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였던 득안성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논산은 다른 곳보다 빠르게 발전되었는데 1910년 나라가 빼앗기고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전국의 농산물이 강경에 모여서 일본으로 수탈되었던 가슴 아픈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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