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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0. 2016

인생에 정답은 없다.

우리는 무얼 찾고 있는가. 

인생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을 담아놓는 것이 인생이다. 100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인생이 있고 1,000만명이 있다면 1,000만 개의 인생이 존재한다. 사람의 수만큼 늘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즉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의미이다. 누군가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그냥 표식을 보고 따라가는 헨델과 그레텔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즉 현실적이지 않은 동화 속 삶을 쫓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다. 


남들이 볼 때 그럴듯한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인생인가. 인생은 누구보다 잘살고 새 아파트에 살고 좋은 차를 몰고 다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 2016년이 시작된지 벌써 10일이 지나가버렸다. 그 시간 동안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송년회 모임에 참석하면서 바쁘게 산 사람들도 있고 그냥 일상대로 산 사람들도 있다. 가족과 여행을 간 사람들도 있고 영화를 본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같은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담배를 덜 피고 술을 덜 마셔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생의 길이는 상대적이다. 90살쯤 살면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10대에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40대에 갑작스럽게 심근경색 등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을 불쌍하게 바라볼까. 참 안됐어... 뭐가 안된 건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커서 결혼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인생이 바람직한 것인가. 모든 인생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그 의미가 있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는 절대적인 도덕률이란 것은 없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빈약한 지식으로 그걸 지키려다가 보면 우기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 다른 이가 규제할 수도 없고 제약을 가할 수도 없다. 그것이 자신의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사회의 통념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건 온갖 지식으로 무장된 철학자 앞에서 심문(?)을 당하면 결국 좌절감에 손을 들게 된다. 


남자라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 역시 누군가에게 이러한 인생은 좋은 것이라고 push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항상 고민한다. 과연 그 말이 맞는 것이냐고. 좋은 사람이란 건 자신이 보았을 때 부담이 되지 않는 그런 능력의 대상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필자 또한 누군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에만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직업들이 있다. 아무리 상처를 받고 인생의 무게에 힘들어할 때도 말이다. 작가가 불행할 때는 그냥 혼자 견뎌내야 한다. 그걸 못 견딘다면 작가를 때려치워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하는 인생의 길을 살고 걷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알코올 도수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증류주를 만들어서 화약에 떨어트린다. 불이 붙지 않으면 불량, 천천히 타면 합격, 활활 불타오르면 좋은 술이다. 이 테스트로 시작된 알코올 도수 테스트는 지금까지 모든 술의 알코올 도수의 단위가 된다. 인생은 그런 단위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가치를 매기려고 한다. 인생의 종류에 동일한 색채를 지닌 삶 따위는 찾을 수가 없다. 소통하지 않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당신의 자만이다. 


Why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데 넌 못하냐. 왜 노력하지 않냐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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