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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05. 2020

자신의 발견

송애당 김경여가 걸었던 공간

필자에게는 고향이라는 곳이 딱히 의미가 없다. 대전에 사는 어떤 이들은 대청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곳이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며 매년 찾는다고 하는데 필자는 단 한 번도 어릴 때 자란 서울의 집이나 동네를 가보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기억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일까.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허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서 낙향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대전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구마다 공공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5월부터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기에 맞춰서 청소년수련관을 운영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대덕구 청소년수련관에도 수영장이 있는데 지난 2월부터 잠정적으로 운영이 중단되었는데 거의 3개월이 지나서 운영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설이 운영이 아직까지 안되고 있으니 주변을 돌아보기로 한다. 대덕구 청소년수련관 옆에는 조선 효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던 송애당 김경여 선생이 병자호란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1640(인조 18)에 지은 별당이다. 조선시대에 인물들을 보면 정치의 그 마력(?)에 빠지지 않고 쉽게 그 자리를 벗어나 고향에 낙향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1650년(효종 1)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군사력 배양에 힘썼는데 오늘날에는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아우르는 도지사와 비슷한 자리이니 상당히 권세가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충청도를 말하면 조선 중기와 후기를 아우르는 유학자들이 중심을 이루는 곳이다. 김경여 역시 동문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집(金集)과 교유하였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신독재 김집 하면 그 깊이만으로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사람이다. 

청소년 수련관에 들어가서 수영을 할 수가 없으니 오래간만에 이곳 공원을 거닐면서 김경여의 송애당을 보기 위해 나아가 본다. 송애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 않은 소나무의 굳은 절개와 우뚝 선 언덕의 굳센 기상을 마음에 간직하겠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송애당 외에는 주변에 아무 주택도 없어서 당시의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살 경제적 여력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김경여 역시 힘없었던 시기 병자호란을 겪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는데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회덕으로 돌아가 생활하였다. 당시의 회덕이 바로 이곳이다. 덕이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의 회덕은 의미가 좋다. 

팔작지붕의 송애당이 저 앞에 있다. 지붕 중에서는 최고의 구조가 팔작지붕으로 궁실의 법전(法殿)이나 절의 금당(金堂 : 大雄殿) 등 중요 건물의 지붕은 대체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찰을 가시는 분들은 대웅전을 보면 팔작지붕이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있다. 

원통형 기와, 바라지 기와, 귀면와, 왕지 기와 등의 기와로 아름답게 장엄(壯嚴)되는 팔작지붕은 지금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김경여의 묘는 지금의 세종시에 자리하고 있다. 김경여는 1596년 12월 9일 회덕현 백달촌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다. 김경여의 어머니인 송 씨 부인은 송남수(1537(중종 32)∼1626(인조 4))의 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났다. 송남수는 호가 송담(松潭)으로 호조 정랑 · 임천군수 등을 지낸 사람이다. 대전 대덕구 회덕 지역에 근거한 명문거족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세거성씨 가문 중의 하나인 은진 송 씨인 송남수는 자신의 길을 밝혀주는 스승과 같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발견했던 충청도 기반의 수많은 유학자들은 어릴 때 누구나 한 명 이상의 부모나 조부, 외조부등의 스승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김경여는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처음 부임한 곳이 충청도 부여 현감이었다. 지금도 부여에 가면 그 시설들이 남아 있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머니가 벼슬에 나아가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큰 선비를 되길 원한 것과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넉넉하지 못했기에 나아갔다. 인조반정 직전에 장인 이귀로부터 반정의 거사 권유를 받았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김경여는 “거사란 일이 성공하고 난 뒤에 생기는 이득과 자리에 뜻이 없으면 참여할 수 없는 것”이라며, 참여하지를 않고 회덕으로 낙향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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