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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3. 2020

마의태자 (麻衣太子)

옥천 용암사에 새겨진 마의태자상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당연할 것이다. 국가가 수립되고 나서 시간이 지나 국운이 기우는 것은 역사 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마지막 왕이나 태자는 무언가 안타깝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져내려 온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이었지만 고려의 태조 왕건에서 항복하면서 금강산(당시 개골산)에 들어가 베옷(마)을 입고 지금의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옥천의 용암사는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의 공장(工匠) 후손이 염불 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했다는 마애불이 있는데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건립이 552년이니 시간으로만 본다면 1,500여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사찰이다. 옥천 장령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로 지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용바위를 훼손하여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창건은 오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타버렸다가 중건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오래된 유물로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인 마애불과 쌍석탑(雙石塔)이 있다. 

걸어서 위로 올라가 보니 옥천의 산하가 아래로 내려다보여서 시원스러운 풍광이 펼쳐진다.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데 어찌하여 충신·의사와 함께 민심을 모아 싸우지도 않고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느냐며 반대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쓰인 소설도 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신라를 다시 살리기 위한 숨겨진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잠시 머물러 용바위 위에 서서 신라의 서울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사찰이다. 

계단으로 올라오면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시기상으로 보면 마애불은 높이 3m에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의 태자를 상징하는 마의를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갔지만 위에 바위를 잘 조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형태가 잘 드러나서 마애불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부처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통곡하였다는 마의 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용암사는 천축국(지금의 인도)을 다녀왔다는 의신 조사가 법주사보다 1년 먼저 창건하였다고 하는 사찰이다.  천축이란 이름은 하늘의 불국, 즉 부처의 성지란 뜻이란 의미다. 오래전에 신라나 당나라 스님들의 꿈은 천축국, 즉 석가가 태어난 성지순례였다. 당시 스님이 이용한 해로는 고대 인도와 중국 한반도를 잇는 바닷길을 통해 오고 갔다. 고난의 여정을 통해 거듭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묘하게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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