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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8. 2020

5.18

성공한 쿠데타는 단죄할 수 없다?

전두환 씨가 주장하는 대로 성공한 쿠데타는 단죄할 수 없다는 말은 성공한 암살은 범죄가 아니다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황당한 주장이다. 국가를 위해 국민의 안전을 위해 군대는 존재할 뿐이지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활용하는 조직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에 의해 운영되며 국민의 희생에 의해 유지되는 군대를 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두환 씨의 야욕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전쟁이 1953년까지 이어졌기에 육사에서는 정규과정인 4년을 채우는 초급장교들이 많지 않았다. 미국도 그렇지만 전시에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는 지휘관이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이 빨리 과정을 마치고 전장으로 초급장교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육사 11기생들은 1955년에 정규 4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한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당한 앞 기수들은 4년 정규과정을 다 채우지 못했기에 선배기수로 칠 수가 없으며 자신들이 1기라는 주장을 하며 1기를 의미하는 '하나'에 모임의 '회'를 붙여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이끈 것이 1962년이다. 전두환 씨는 영관급 장교 때부터 영남 출신들을 집결시키며 군대의 주요 요직에 하나회 장교들을 배치시켜나가며 자신은 박정희에게 줄을 대며 군대의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한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장군 보직인 1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거치며 명실공히 하나회를 이끄는 리더로서 자리매김한다.  하나회에 소속된 이들은 진급 1순위와 주요 보직을 독차지했다. 서서히 박정희 정권이 유신개헌 등으로 한계에 달하기 시작할 때 전두환 씨는 1976년 대통령 경호실의 작전 및 보안 차장보가 됐다가 1978년 1월 육군 제1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미 하나회의 멤버들은 주요 요직에 속속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되기 전 1979년 3월 군 내부의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국군 보안사령관에 임명된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은 조직과 인력, 사회의 불안적인 상태가 맞물렸지만 절대권력을 잡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다른 도시의 대학들은 이미 5월 17일 군대가 봉쇄했지만 광주는 5월 18일에 조금 늦게 봉쇄를 시도했다. 광주는 권력을 잡기 위한 좋은 발판이 되어주었다.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증거는 남아 있다. 20 mm 구경, 6 배럴, 공랭식의 개틀링 포인 발컨의 위력은 상당한 것이 사실이다.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서 아군 호위용으로도 많이 사용이 된다. 헬기에서 발컨을 인근 건물에 쏘아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광주시민들을 향해 쏜 것만을 전제로 하면 문제가 있다. 20mm의 발컨을 사람이 제대로 맞는다면 특정부위가 없어질 정도로 날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공중 호위 지원으로서 발컨이 사용되고 지상에서 공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을 몰이식으로 공격하며 시민이 아닌 적군으로 보았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과 비슷한 대상에게 쏘아보고 이야기하지는 말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5.18은 있어서도 안되었던 어두운 한국 민주화의 흔적이다. 공수부대의 막강한 화력에 광주시민들은 무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비대칭 전력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전북 FC와 뭉쳐야 찬다 팀과 경기했던 것과 겨우 비교될 수 있을까. 그나마 뭉쳐야 찬다는 예능이어서 절대적인 전력 차이를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시작부터 15:0으로 잡아주고나 출발이나 한 것은 그나마 아주 약간 공정해 보였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날이 5월 18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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