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를 모신 김제 서강사
성공(成功)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공이라는 것을 이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공은 남들보다 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어떤 자리에 오름에 있지 않다. 성공의 본래 가치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스스로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그 선을 넘어서려고만 하고 있다. 그리고 배움 역시 그 기준에 맞춰 있기에 지속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김제의 서강사는 김제의 순국선열인 장태수를 모신 사당이다. 장태수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변해 가는 시대에 적응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 육성을 교육목표로 지금은 없어진 금구 신명학교를 세웠다.
장태수는 자신의 사재를 털고 부족한 기금을 문중에서 어렵게 걷어 시작한 교육사업이었으나 교실 7칸짜리의 학교를 세우고, 학생 200여 명을 모아 개교식을 거행하였지만 금구신명학교는 1910년(순종 4) 한일합방 때 폐교되고 말았다.
장태수의 교육관을 보면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볼 수 있다. 그는 단순한 감정적 소모에서 벗어나 적인 일본을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여 구체적인 대응 방식을 갖추게 하고자 하였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단순히 일본에 대해 배척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는 것이다.
서강사의 안쪽으로 들어오면 비교적 잘 보존이 되었으며 목재의 건축양식으로 볼 때 잘 지어진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학교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영재들을 모아 배일 정신을 고취하는 민족 교육의 도장으로 시작된 금구 신명학교는 근동에서 뿐만 아니라 정읍·부안·태인 등에서까지 학생들이 모여들어 두세 차례 교실을 증축하였으나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 일제가 주는 돈을 거부하고 세상을 떠났기에 당시 일제가 장태수를 으뜸 위패로 모시는 서당 건립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고려 말기의 충신인 송은(松隱) 장안세(張安世)를 으뜸 위패로 하고 장태수를 배향하기로 한 뒤 건립 허가를 받았던 곳이다. 현판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고 쓰여 있다.
유림들의 모임 장소로 쓰인 존경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방선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과 함께 장태수의 영정을 모신 사우 서강사와 내삼문, 외삼문, 객사인 계선재(啟善齋)등 부속 건물 7동이 있고, 경내 밖에는 고직사 1동이 남아 있다.
이후 1911년 금구신명학교의 후신으로 서도면 신명학교(新明學校)와 동도면 개성학교(開成學校)를 합쳐 학교 이름을 사립금구보통학교(私立金溝普通學校)라 정하였다. 동년 4월 1일 사립봉성학교 교원 송병희(宋炳熙)와 수류면 상옥리에 있던 사립인명학교 교원 정대선을 사립금구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임명하여 6월 16일 금구향교(金溝鄕校) 명륜당을 빌려 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