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의 주역 김좌진 장군
6월 6일은 현충일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그중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해 순국한 자로 정의하고 있다. 최근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을 처분할 수 있는 법원의 판결이 있어서 일본과의 관계가 그렇게 수월하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일본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외교는 힘의 균형을 어떻게 자리 잡는데 그 묘미가 있다.
일본은 지금도 일제강점기를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한반도를 살기 좋게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강점기 당시 1등 국민은 일부 조선의 고위관리와 일본인, 2등 국민은 힘없는 조선의 백성들을 지칭하고 희생시킨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일 강점의 시간이 더 진행되었다면 인종차별처럼 오랜 시간 이 땅에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김좌진 장군이 자신의 재산을 다 정리하고 넘어가 북만주에 터를 잡고 김좌진 장군은 독립군을 양성하였는데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계획을 세우게 된다.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온 일본군을 백운평 숲 속에서 매복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동해 천수평(泉水坪)에 주둔한 일본군에 승리한 이후에 홍범도 부대와 함께 연합전선을 편 것으로, ‘청산리대첩’이라는 이름으로 만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덥긴 무척이나 더운 날이다. 김좌진 장군의 집안은 넉넉했기에 일제강점기에도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은 이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을 때 분노하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김규식,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군대를 개편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총사령관에 취임하게 된다.
6월 6일 대전의 현충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는 현충일 추념식이 열렸다. 올해로 65회를 맞이하는 추념식에는 호국보훈과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청포도라는 시로 유명한 이육사 시인의 딸도 참석했지만 추념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문은 남녀 두 장교가 낭독했는데 한 명은 김도현 해군 대위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였다.
보령의 김좌진 장군묘는 잘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김좌진 장군의 묘는 보령에 있지만 생가는 홍성에 있다. 홍성에서 열리는 특별기획전은 오는 31일부터 개최되는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 개최와 청산리 대첩 100주년을 기념해 홍주의병·백야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을 주제로 열리고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강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면 국가가 반드시 보답한다는 데에 있다. 인종문제나 빈부격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국가가 희생한 국민들은 반드시 보상하기에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고 국가를 위해 나선다.
주차장이 널찍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비어 있기에 아주 편하게 주차를 했다. 항상 시대의 변화와 일반 대중의 아픔에 민감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김좌진의 삶은 청산리전투의 승전으로만 기억하기에 아쉬움이 있다. 이렇게 일찍부터 더워지기 시작하니 오는 7월과 8월은 얼마나 더워질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