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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0. 2020

기리는 일

옥천 이기윤 망북비와 이교신선생묘

요즘에는 선양이라던가 기리는 것에 대해 많은 나오고 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안장될 자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장되지 못 한 사람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기리는 것은 열악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던가 불의한 힘에 부역하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잘하는 것은 대부분 다 잘할 수 있다. 

지금은 검도가 하향세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검도의 인기는 상당했다. 일본에서 시작된 일도류의 지금 검도는 1950년대부터 조금씩 자리 잡아왔다. 충북의 검도는 이교신이라는 사람이 안착시켰다고 한다.

묘까지 가는 길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바로 보인다. 1970년대 들어서며 지도사범 제도가 없어져 모친이 있는 옥천으로 낙향한 선생은 1972년 52세 나이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던 1921년 옥천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시모노세키 상공학교에 다니며 검도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1955년부터 충북도 치안국 지도사범(현 경찰청, 사무관급)을 맡아 청주경찰서 상무관에서 처음 검도를 가르쳤다.

묘 앞에는 그가 충청북도에 검도가 안착되기 위한 노력 등이 새겨져 있다. 검도에는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주고 그 속에서 공통되는 이치를 일깨워주는 아이키도와 북진 일도류처럼 한 가지 기술을 통해 그 속에서 깊이가 달라지며 깨달아가는 과정이 있다. 

이기선 선생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옥천 이기윤 망북비가 자리하고 있다. 망북비라는 한자에서 어떤 의미인지 예측이 가능하지만 망북비라는 문화재는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참을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서 올라가다 보면 이기운 망북비로 가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멀리 망북비가 그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덕분에 저녁부터는 시원해지겠지만 지금은 덥기만 하다. 

시골 유생일지라도 자신의 소신을 보여준 것이 바로 옥천 이기윤 망북비다. 삼일운동을 촉발시킨 1919년 고중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면서 1920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해아 달이 빛을 잃었구나, 온 국민이 상을 당하니 망국하도다라고 새겨져 있다. 국상을 당하면 지방 유림들이 이곳에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했다고 한다.  

이 비가 지니는 의미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은 우리 민족의 자존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소신이나 생각에 따라 어떤 대상을 기리기도 한다. 누군가를 기린다는 것은 그 역사적인 사실이나 아픔 혹은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기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옥천에 자리한 이름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옛사람의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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