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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2. 2020

마산 사태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발걸음

마산이라는 지역은 부정선거 혹은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초반에 있었던 곳이다.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는 유례없는 부정 선거가 알려지자 저녁 마산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부정 선거 규탄 데모가 전개되어 갔다.'제1차 마산 사태'는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당국이 야당 참관인을 강제로 축출하고 부정 선거를 자행하려는 데 반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8명의 시위 군중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6월은 민주화 항쟁으로 기억되기도 하며 한국전쟁이 발발되었기 때문에 호국의 달로 기억되기도 한다. 경제민주화는 지금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상태이지만 정치민주화는 상당히 많이 진척되었으며 국민들도 과거와 달리 생각이 깨어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바탕이 되었다. 

지금은 현대화된 마산역이지만 마산역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927년 4월 1일에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구마산역, 북마산역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마산시(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내 중심부에 모두 있었다. 이는 당시 마산시의 시내 조성이 좁은 구역에 몰려 있었다. 

구 마산역을 뒤로하고 이곳에 신마산 역이 들어선 것은 1977년이다. 완공 당시만 하더라도 허허벌판이었던 마산역은 현재 마산 시외버스터미널과 더불어 이 곳을 중심으로 상업 시가지가 크게 발달하여 있는 상태다. 당시에 마산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곳이 어떤 풍경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이곳이 활성화되어 있다. 

산역의 앞의 광장에는 마산 사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 민주주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가 세워져 있었다.  '마산 의거'로 불리는 '제2차 마산 사태'는 4월 11일 1차 사건 때 행방불명된 마산 고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비참한 형상으로 한 낚시군의 낚시에 걸려 시체로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마산의거로 촉발된 운동으로 인해 이승만이 하야하게 된다. 

마산이라는 도시는 섬유공업으로 대표되던 곳이었다. 지인과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산업의 경쟁력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발전해온 마산의 섬유 공업은 1980년대의 호황 시대를 거치면서 1990년대 사양의 길을 걷는데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섬유 공업 역시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조창 설치 이후 공관과 민가가 번성하면서 ‘산호포’(山湖浦: 일명 ‘午山津’이라 불림)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때 전염병이 만연해 이 재해를 피하려고 午山(오산)의 ‘午’ 자는 ‘馬’ 자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다 하여 마산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태종대에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계수관(界首官:종 2품)의 단부(單府)를 제외한 지역은 모두 뫼 산(山) 자 또는 내 천(川) 자로 고치게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마산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공간의 마산역에는 마산 역전통합시장도 자리하고 있다. 통합시장으로 가기 전에 마산 사태를 알리는 수호비가 세워져 있다. 마산 사태 이후에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촉발하게 한 1979년의 부마 민주항쟁 역시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지만  부마 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 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2010년 12월 15일을 기하여 경전선 구간 중 최초로 삼랑진역에서 마산역에 이르는 구간이 복선 전철화되어 개통하면서, KTX의 여객 취급을 개시하였으며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인 부전~마산 복선전철 개통 후 시종착역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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