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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7. 2020

고현 (古縣)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의 성지 

거제도의 옛 지명이기도 한 고현은 한자로 오래된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州)·부(府)·군(郡)·현()의 지방행정구역 중에서 가장 낮은 단위인 현은 진시황(秦始皇)은 종전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 제도를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는데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 34곳에는 종 5품의 현령이 파견되었다. 작은 현 141곳에는 종 6품의 현감이 배치되었다.

현재 거제도의 인구에 맞먹을 정도로 많은 포로가 고현동 지역에 수용된 적이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많은 공산군 포로들이 이곳에 수용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17만 명에  달했다. 지금은 고현성이 자리한 거제시가 거제의 중심 시가지이지만 1423년 경상 도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거제 읍성(巨濟邑城: 古縣城)을 신축하여 1432년 읍을 사등성에서 옮겼다가 1664년(현종 5) 고현성(古縣城)이 폐지되고 거제 현아(巨濟縣衙)가 읍내면(지금의 거제면)으로 옮겨지기도 했었다. 

밤에 오는 거제의 고현성은 이번이 세 번째다. 조명이 잘 설치가 되어 있는데  거제시청과 인접한 곳에 있어서 그런지 거제의 주차장과 연결된 곳에 새롭게 복원되어 잇는 곳이다. 

석축성으로 삼문(三門)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과 치(雉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읍성이지만 17만명을 수용하기 위해 고현성은 허물어졌다. 

과거 모습의 고현성이 잘 남아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거제도를 처음 찾았을 때 먼저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본 기억이 난다. 17만 명이라는 숫자는 지방의 웬만한 소도시를 넘는 숫자다. 한꺼번에 그 많은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고현동이라는 지역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 부근이 모두 포로수용소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거제도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서 다시 고현성으로 올라가 보았다. 왜구가 자주 출몰하던 거제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5월 7일 옥포에서 이순신과 원균에게 패한 후, 거제읍성(邑城)을 공격하여 5일 후인 12일 날, 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가 전사(戰死)하고 함락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수많은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군현 제도는 호족의 신분과 혈연 등을 참조해 계층적으로 편성하였는데  이때에도 거제는 적지 않은 외면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귀족·호족의 거주지는 부(府)·목(牧)·도호부(都護府)였고, 평민들은 군과 현, 천민들은 향(鄕)·소(所)·부곡(部曲)에서 무리 지어 생활하였다. 거제의 역사와 함께 백성들의 힘든 삶이 있었을 고현성의 분위기는 차분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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