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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4. 2020

신미양요 (辛未洋擾)

어재연과 어재순 순국하다. 

미국의 함대가 이 땅에 상륙하려고 했던 사건으로 전투가 일어났으며 쇄국정책을 더 강화하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 신미양요다. 청나라를 제외하고 모두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그 시기에 미국인들 역시 오랑캐였다.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몇 년 전 어재연과 어재순의 묘소를 찾아왔을 때와 다른 모습이다. 음성의 이곳은 대규모 택지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사차량만 진입할 수 있었는데 공사 관계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전에 왔을 때와 전혀 다른 풍광이다. 전에는 일부 마을도 보였고 산과 들, 인삼밭이 있었는데 모두 깨끗하게 정리되고 택지개발이 한참 진행 중에 있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비교적 찾기가 쉬웠는데 이번에는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계속 찾아가면서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택지는 주택 건설 용지 및 공공시설 용지를 의미한다. 음성군에서 충북혁신도시 다음으로 대규모로 택지 개발하는 큰 사업일 듯하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조건이 거부되면서 시작되었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는데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형인 어재연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벼슬을 하지 않았던 동생 어재순은 분연히 궐기하며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적이 두려워서 어찌 나라를 구하는 일을 못하랴.”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광성보로 달려갔다고 한다. 

형은 찾아온 동생을 보고 궁벽한 고을의 일개 포의에 불과한 몸이며 너는 왕사(王事)로 죽는 나와는 다르다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꾸짖었지만 물러서지 않고 미군과 싸운다. 형인 어재연과 어재순은 신미양요에서 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게 된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고 한다. 

전에 왔을 때와 달리 개발 중인 곳이어서 관리가 안되고 있었다. 주변에는 수풀이 많이 자라서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전사한  어재순을 이조참의에 추증하였으며 형인 어재연은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에 추증하였다. 이 비가 없었으면 누구의 묘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하였다는 문구가 보인다. 

무인으로서 전사한 어재연은 체격이 장대하고, 절인(絶人)의 힘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장사(壯士)로 여겼다"라고 했으며 어재순 역시 그 절의가 남달랐다고 한다. 전투에서 이겼지만 강경한 조선의 태도에 미국은 물러났지만 일본은 1854년 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 조약을 체결하였다. 신미양요 이후에 흥선대원군은 조·미 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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