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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4. 2020

함흥차사 (咸興差使)

태조의 절친 박순 죽음을 당하다. 

권력에 대한 욕심을 말할 때 태종 이방원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세종의 태평성대를 열어주기도 했지만 1차, 2차 왕자의 난으로 형제를 죽이기도 했다.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는데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계속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차사를 죽이거나 가두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에 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함흥차사는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말할 때 비유하였다.

이방원은 10여 명을 보내도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이성계의 어릴 적 친구였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이 가게 된다. 여러 날을 설득하면서 박순이 다시 바둑판을 밀고 땅에 엎드려 우니, 상왕이 슬피 여겨 곧 대궐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박순이 하직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상왕이 속히 가라고 했다. 드디어 대답을 받고 이방원에게로 갔으나 급작스럽게 병이 들고 말았다. 

이성계의 신하들은 그를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박순이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으리라 추측하고 사자에게 칼을 주면서 말했다. “만약 이미 강을 건넜으면 추격하지 마라.” 그러나 병에 걸려 강을 건너지 못한 박순은 사자에게 죽음을 당한다. 이성계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통곡하며 박순이 무어라고 말했냐고 물었다.  “북쪽으로 행궁을 향하여 ‘신은 죽습니다. 원컨대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지 마소서.’라면서 대궐로 가는 발걸음을 그대로 하기를 원했다는 말을 박순이 하였다. 

음성군에는 그 박순을 기리는 박순 사당이 남아 있다. 음성군 대소면 대금로 247번 길 52-2에 있는데 박순 충신문은 1686년(숙종 12년)에 삼성면에 세워졌다가 1886년 중수,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건립하였으며 2,000년에 중건하였다. 

박순은 음성 박씨로 박서를 시조로 하고 박래복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로 박순(朴淳)의 사급지(賜給地)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성석리였는데 후손들이 조선 중엽에 안성시 이죽면 등지로 이주했고, 순조 때 박래복이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로 이주하여 세거 하였다고 한다. 

바야흐로 수박이 맛이 있는 시기가 돌아왔다. 특히 음성수박은 맛이 좋은데 대소수박의 당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우스 시설에서 촉성재배를 통해 생산되는 다올찬 수박은 과피가 얇고 선홍색의 과육과 짙은 호피색 무늬로 달고 아삭아삭한 맛을 자랑한다. 대소수박은 품질이 균일할 뿐 아니라 한국능률협회로부터 2년 연속 웰빙 농산물로 인증받아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박에 비해 높은 가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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