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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5. 2020

흑룡강

신유 나선정벌을 하다. 

흑룡강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도 그곳에서는 호전적인 민족의 후예들이 만 명이 넘게 거주하고 있다. 이 땅의 역사 속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나라는 발해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된 발해의 발전은 2대 무왕(武王, 719∼737)과 3대 문왕(文王, 737∼793) 때에 이루어졌다. 2대 무왕 때는 처음 해외정벌이 이루어졌는데 바로 당나라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었다. 당시 말갈족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명을 앞에다가 붙였다. 흑수말갈족은 바로 흑룡강 지역에서 거주하던 이민족이었다. 

발해의 후방지역에 있었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에 손을 내밀자 2대 무왕은 흑수말갈을 치게 된다. 흑룡강 지역은 이후로도 각종 국제문제를 야기하는 대상지역이기도 했다. 나선은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인데 17세기 흑룡강 지역까지 진출을 하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은 후 흑룡강에서 벌어진 전쟁에 청나라는 그곳의 러시아인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게 원병으로 조총수 들을 요청하였다.

칠곡에서 태어난 무장 신유 장군의 유적지가 지금 남아 있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무직을 거쳐 효종 9년(1658년) 함경북도병마우후로 있을 때 청나라 요청을 받아 흑룡강으로 전투에 나서게 된다. 효종은 반청사상을 갖고 있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시켜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나선정벌에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유 장군은 흑룡강 부근에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를 나선정벌이라고 하며 장군은 그 전공으로 가선대부로 특진된 후 요직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지냈다. 장마가 시작되어서 그런지 마치 운무가 낀듯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다. 신유는 조총수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테파노프를 비롯한 러시아군 대부분을 섬멸시켰다. 전투 직후 청의 요청에 따라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해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서 12월 12일에 회령에 귀환하게 된다. 

외삼문인 북정문(北征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면 신도비각과 존성재 건물이 나오고 내삼문인 선위문(宣威門)을 지나면 신유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있다.

사후 숭무사에 제향하고 경내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판서 이현일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교리 이동적이 전액 하고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 전쟁 때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1680년(숙종 6)에 장군이 62세로 생을 마감하자 왕이 제문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북벌을 하기 위해 힘을 길렀던 그 힘을 신유 장군이 보여주고 러시아군을 정벌한 것에 대해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나 효종의 북벌론은 결국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효종은 대규모 양정 색출작업과 노비 추쇄 작업을 펼쳤으나 별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양반층의 면역 특권을 철폐하는 개혁이 요구되었는데, 양반층들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군주의 수신, 부세경감 등을 통한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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