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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6. 2020

한티마을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TV 프로그램이 나는 자연인이다. 자연이 좋아서 찾아간 사람도 간혹 있지만 모두들 하나 이상의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시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그 시스템에 흡수되어 산다는 의미다. 최근의 특정 종교처럼 도시 속에 스며드는 경우도 있지만 기존의 시스템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전국에  있는 초기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살았던 마을들은 대부분 산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를 잠시 벗어나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 천주교에서는 이를 피정(避靜)이라 부르고 있다. 칠곡에는 영남 천주교의 시원 지라는 한티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천주교 순례길인 ‘한티 순례길’ 코스의 출발지로도 좋다. 한티에서 시작해 평산 아카데미를 가볍게 돌아볼 수 있다.  한티는 1980년대 초반 대구대교구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지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한 김현상 가정이 신나무골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피해 한티마을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어 본격적인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가게 된다.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오니 크고 작은 돌들이 서 있다. 이를 한티마을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1868년 병인 3차 박해 때 갑자기 나라의 명령을 받은 가산산성의 병사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합세하여 한티 신자들을 체포하여 현장에서 한꺼번에 37명 이상의 신자들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순교한 한티의 남녀노소 순교자가 있으며 마을이 존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박해 이후에 1886년에 한불 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모여 살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신자들이 만주와 일본 등지로 이사를 감으로써 급격히 신자 수가 적어지고 1960년 초에는 겨우 두 가정만 남아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이곳의 마을은 재현해놓은 듯 보였다. 정말로 산골로 들어와서 살았을 것 같은 움막과 흙벽돌로 지어진 집들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먹고살기 위해 곡식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성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도자기를 구워서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비가 오는 날이어서 그런지 산에 낀 안개와 그 앞에 마리아상이 평온하게 어우러져 보인다.  대구 읍내에서 60리 24㎞정도 떨어진 팔공산[1,151m]과 가산[902m] 사이에 있는 해발 600m 이상의 높은 산중의 마을은 조용했다. 

한티성지에서 평산아카데미로 걷는 길은 숲길로 조성되어 있다. 편도로 30여분이 걸리며 왕복은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칠곡의 평산 아카데미라는 곳은 처음 와봤는데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로 결혼식이나 기업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팔공산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팔공산이라는 산은 경북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에게는 그 어떤 산보다 의미가 있는 곳이다. 영천, 칠곡, 대구, 군위 등에 걸쳐 있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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