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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6. 2020

정치라는 길

여헌 장현광의 모원당

자신의 하고 싶어 하는 것이나 권리를 국민의 권리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넘쳐나는 요즘 진정한 정치인의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한다. 이순신을 천거하기도 했던 서애 류성룡은 여헌 장현광도 추천하였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논산 돈암서원의 대유학자 사계 김장생과 같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벼슬길의 대부분은 마다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91년 겨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의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살던 곳이 소실되자 이곳에 모원당이라는 고택을 1606년에 지어주자 머무르게 된다. 

모원당은 지금 후손이 살고 잇는데 소박하고 간결한 건축양식의 모원당의 옆에는 규모가 큰 고택이 지어져 있다. 당시에 지었다는 모원당은 'ㅡ'자 형으로 정면 6칸, 측면 1칸의 흩처마 정자 지붕이다. 

 1604년 순천 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 지평·성균관 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의 인생을 보면 사양하는 인생이었다. 

고택 앞에 서니 안에서 사납게 개가 짖었다.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모원당을 보기 위해 옆에 있는 공원길로 올라가 보았다. 정치라는 길은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 그 길이 국민을 향해 있는가 혹은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향했는가를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적어도 여헌 장현광은 도덕정치의 길을 생각했다. 

1607년에 건립한 청천당은 장현광의 아들인 청천당 장응일(1599~1676)이 건립한 당우로서 학문을 닦고 교유의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청천당은 정면 3칸과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집이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 한 칸씩을 두었으며,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가기도 했던 여헌 장현광은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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