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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9. 2020

논개 (論介)

논개를 기린 의암사와 의암호

진주성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왜군의 적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은 의기 논개를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논개가 관청의 기생이라는 것외에 아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이라던가 가정 그리고 어떻게 관청의 기생이 되었는지 등에 별 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의기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영정은 장수군과 진주시가 공동으로 제작한 것으로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장수는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것과 금강의 시원지인 신무산이 자리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수읍을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금강발원지 뜬봉샘을 품은 신무산은 호남정맥의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수분재가 자리하고 있다. 수분재는 물을 나눈다는 의미의 고개로 금강과 섬진강이 갈라진다. 

논개를 기리는 의암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 옆에는 의암호가 있다. 의암호에서 채워진 물은 아래로 흘러내려가서 금강으로 합류한다. 의암호에는 의암공원과 장수누리파크공원이 있어서 장수군의 중심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장수군에서 합류하는 물은 다른 지역과 달리 바로 금강이라고 부르는 물로 합류하게 된다. 

장수군은 신안주씨 집안에서 태어난 논개의 고장이다. 신안 주씨(新安 朱氏) 중국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로 동국시조 송나라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은 1224년(고려 고종 11년) 남송(南宋)에서 고려로 망명하여 나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날이 너무나 더워서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르고 몸에 힘이 빠진다. 의암사로 들어가서 논개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보려고 들어가본다. 1574년 전라북도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주논개가 태어났다고 한다. 논개라고만 알고 있던 여인에게 주 씨가 붙으니 조금 어색하다. 불과 19살 꽃다운 나이에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을의 훈장이었고 어머니는 밀양 박 씨로 논개가 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고 시동생 주달 무에게 의탁하지만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 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고 달아났다고 한다. 장래 성인이 된 뒤 아들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삼기 위하여 민머리인 채로 장래의 시집에서 데려다가 기르는 여자 아이인데 대체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하는 혼인 풍습으로 혼인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이 팔려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여자의 인생은 남자의 길과 함께 걸어가는 경향이 있다. 논개의 인생을 보면 가련하기도 한 여자의 인생을 엿보게 된다. 작은 아버지에 의해 민며느리로 팔려 갔다가 어머니와 친정으로 피신했지만 돈을 주고 산 김풍헌은 그녀를 고발한다. 그렇지만 현감이었던 최경희는 모녀의 사정을 듣고 무죄 방면했는데 나이가 찬 논개는 최경희의 첩으로 들어가 그를 뒷바라지하게 된다. 최경희는 진주성 2차 전투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기생으로 위장하여 최경희를 순절하게 만든 적장 게아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순절하였는데 이후 진주성의 아래에 있는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된다. 논개는 기생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최경희의 첩이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천추제 죽지 않는 논개,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라고 그녀를 표현했다.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게 보여지지만 그 물결 위에 붉은 논개의 마음이 남아 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는데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싿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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