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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1. 2020

낙동강 대교(洛東江大橋)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끊다.

경상북도 칠곡이 호국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지만 교두보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리는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적을 막기 위해 끊어야 되는 시설물이 되기도 한다. 군단 훈련을 하면서 공병단과 함께 임시교량을 연결해본 적이 있는데 강폭이 너무 넓지가 않다면 기갑사단도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조물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낙동강대교 혹은 왜관 철교처럼 설치 교량 정도의 빠른 이동은 쉽지가 않다. 

구미에서 칠곡을 넘어오면 가장 먼저 호국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호국의 다리 주변으로는 공원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칠곡의 첫인상으로 남는 곳이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과 더불어 단선 철교인 낙동강 대교(洛東江大橋)로 출발한 이 트러스트 구조의 다리는 호국의 다리라고 불리고 있다. 경부선의 복선화와 더불어 1941년 11월 30일, 이곳에서 100m 상류부에 새로운 노선과 교량이 가설되면서, 기존의 철교는 기차의 통행이 폐쇄되고 국도 4호선의 도로 교량으로 사용되었다.

보통 강변마다 자리하고 있었던 나루터의 역할은 다리라는 구조물이 놓이게 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왜관 나루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왜관 철교로 인해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인도교 등의 역할을 수행하던 이 철교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이 최후의 저지선으로 정해지면서  8월 3일 오후 8시 30분 왜관에서 두 번째 교각이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철교의 폭파가 불가피했지만 칠곡 왜관 철교는 칠곡군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6개 교량의 하나로서 최초의 것이었다.  1993년 폭파된 다리가 복구되자 국토 수호의 낙동강 전투를 기리기 위하여 호국의 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리의 아래로는 지금 한참 수경시설이 설치되는 물놀이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래의 둔치에서 제2 왜관교에 이르기까지 중앙무대, 만남의 광장, 장터가 설치되고 3일간 주야로 가장행렬, 횃불 놀이, 공연, 낙동강 평화 선언식 등의 다양한 행사가 있었던 곳이다.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시의 발전은 철교가 놓인 기차로 인해 급속하게 진행되었으며 현대식 구조물의 다리로 인해 나루터는 없어져갔다. 대전의 신탄진의 나루터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듯이 칠곡의 왜관 나루터도 낙동강의 역사성과 함께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다.  칠곡군은 칠곡 왜관 철교 남쪽, 구상 문학관 앞 강변에 있었던 왜관 나루터를 복원하여 낙동강의 역사성을 회복하면서 수변의 신도시를 개발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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