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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6. 2020

인연

안평대군과 인연을 맺은 남지

조선 왕조를 통틀어 왕자들이 가장 많이 죽었던 때는 이방원과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으려고 했을 때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인연을 잘못 맺은 가문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진천군에 묘소가 남아 있는 남지 역시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이 희생당할 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병으로 다행히 면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 씨(沈氏)인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 그렇지만 권력 싸움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진천군에 자리한 남지의 묘소를 찾았다. 음보로 감찰이 되어 부정·지평을 거쳐 의성군(宜城君)에 책봉된 후 1439년 대사헌·호조참판을 거쳐 경상도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1449년 판원사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1451년(문종 1)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병으로 계속 사직과 복귀를 반복하였다. 

남지는 지병으로 수양대군이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를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묘하지만 공간과 공간의 연결도 묘하다. 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내적·직접적 원인이며, 연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외적·간접적 원인이라고 한다. 

남지라는 사람의 흔적은 이렇게 남아 있다. 누군가의 묘소를 찾는 것도 일상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행적 속에 배움도 있다. 

피천득 특유의 천진함과 소박한 생각, 단정하고 깨끗한 미문(美文)으로 완성된 담백하고 욕심 없는 세계를 담았던 수필집 인연처럼 사람과의 인연을 생각해본다. 죽은 사람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碑)인 신도비는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 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남지는 죽은 뒤 1489년(성종 20) 손자 승지 남흔(南炘)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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