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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0. 2020

최초의 효자

신라시대의 소학리 효자 이야기 

효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확립이 되어 내려왔을까. 대중적인 의미의 효자라고 하면 조선시대 초에 유교와 함께 퍼져나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공양한다는 의미는 삼강행실도에서도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효라는 의미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과는 조금은 다른 효의 개념이겠지만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효의 개념도 확립이 되어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공주의 소학동으로 한적하면서도 풍경이 좋은 곳이 있다. 북으로는 금강(錦江), 남으로는 혈양천(血㾗川), 동으로는 왕촌천(旺村川)이 있어 지형이 마치 섬과 같이 되었으므로 소학섬 또는 소학리라 하였던 곳이다. 옛 소학리라는 지명에 자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이곳의 비는 우리나라 기록상 최초의 효자인 향덕의 효행을 가리는 비석이다. 

대전과 공주를 오갈 때 가끔은 이 뒷길로 지나가곤 한다. 오래된 수명의 보호수인 느티나무의 수령이 530년에 이르는데 그 뒤로 정면 두 칸 규모의 건물이 있다. 

중앙부로는 금강(錦江) 지류인 혈저천(血底川)이 형성해 놓은 상당히 넓은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납다리, 높은행길, 참새골, 시학섬, 새밭골, 막골 등의 마을이 들어서 있는 동네다. 

이곳에는 시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정려비의 앞면에는 "지극하여라, 효자여/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었으니/이미 허벅지 살을 베었는데/ 또다시 종기를 빨았도다/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마을이 효자로서 이름이 났으니/영원토록 그 이름 계속될지어다"라는 시가 쓰여 있다. 

영조 17년 (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다시 써서 세운 것과 윗부분이 잘라져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에는 “之閭(지려)”와 “三月日重立(삼월일중립)“ 중 중립이라는 문구가 있어 경덕왕 때에 본래 세운 비는 아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가서 비에 새겨져 있는 한문이 잘 안보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쓰여 있는 글씨가 보인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무엇을 받기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지만 향에서는 그 효행을 알고 이 사실을 주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아뢰니, 왕이 명을 내려 벼 300곡 (1곡은 10두)과 집 한 채, 그리고 토지 약간을 내렸다고 한다. 효라는 것을 알지만 잘 행하지 못하는 1인으로 소학리 향덕비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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