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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2. 2020

김집의 묘

김장생의 학문을 송시열에게 

이이(李珥)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아 집대성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신독재 김집이다. 그는 우암 송시열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학문을 전해주며 우암 송시열의 학문세계를 완성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광산 김 씨인 김집의 묘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35-3에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걸어서 올라가야 만나볼 수 있다. 

김집 선생 사당은 접근성이 좋은 편이지만 김집 선생 묘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올라가야 한다. 평생 그는 사람들에게 덕망의 대상이 되었고 배움을 청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청나라와 주화를 절대 반대하던 김상헌과도 인연이 깊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청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올라오다 보니 한쪽 구석에 '문경공김집선생신도비와 묘역 통로'라는 비가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문경은 시호이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다. 

또 다시 산길로 연속해서 올라가야 한다. 언젠가는 나오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수풀 속으로 걸어가 본다. 

김집의 묘소로 올라가기 전에 신도비를 먼저 만나게 된다. 김집은 선조 때 초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은퇴하게 된다. 

신도비가 있는 곳에서 백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양지바른 곳에 그의 후처 덕수 이 씨의 묘소와 같이 있는 김집의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비문은 공주 7월의 인물이라는 용문 서원의 초려 이유태가 짓고 윤선거가 써서 1663년(현종 4년)에 건립한 '문경공신독재김집선생지묘' 묘비가 있다. 

예약의 체계는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로 이어지며 세워졌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지 못한 원시시대에 초월적인 신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받들고자 하는 원시적인 의식(儀式)을 문자화한 것이 바로 예(禮)자이다. 모든 것은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의 K-방역 역시 감염병 연구와 질병에 대한 체계 확립으로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김장생(金長生)은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특히 예에 관한 연구가 깊었는데 자연스럽게 김집은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에 밝았다. 예에 관한 저술에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와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지간으로 이이의 학맥을 계승하여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유학 사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논산을 예약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김장생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에게 전해졌으며, 김집의 학문은 송준길, 유계, 이유태, 윤선거를 거쳐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지만 조선 후기 당파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면서 후에 조선의 개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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