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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4. 2020

병자호란 (丙子胡亂)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라. 

남은 고사하고 자신 스스로의 능력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자신이 본 세상 안에서 갇혀서 그 안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한다. 새롭게 배우는 것이 쉽지 않고 어렵기 때문이지만 그 결과가 치명적일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하는 외부요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하게 될 때 큰 충돌이 일어난다.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주전과 주화가 대결구도를 만든 것은 두 번이었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할 때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할 때였다. 


청나라가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조선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지는 해 명나라에만 기대며 안일하게 있다가 청나라가 정묘년에 한반도를 쳐들어올 때 강화도로 간신히 피한 뒤 전란을 피했지만 이후에도 준비는 하고 있지 않았다.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친 격이다. 적어도 청나라에 굽히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청나라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지만 적을 알지는 못했다. 반면 청나라는 정묘년의 경험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자국 군대의 강점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수뇌부나 군대보다 가장 큰 피해는 백성들이 보게 된다. 병자년에 청 태종은 12월 1일, 청군 7만 명, 몽골 인 3만 명, 한족 2만 명 등 모두 12만의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다.  세자빈 강 씨와 원손(元孫), 둘째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 인평대군(麟坪大君)을 14일 강화도로 피란 보냈지만 수많은 백성들은 미처 나룻배를 타지 못한 채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인조 역시 강화도로 가려다가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에 갇히게 된다. 조경(趙絅), 김상헌(金尙憲), 유계(兪棨) 등 소장파는 주전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등은 주화론을 내세운다. 김제에 가면 병자호란 당시 무관으로 청군과 맞섰던 백선남 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주화파와 주전파의 대립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등장해서 당시 조정 대신들의 이름은 많이 거론되었으나 무관은 거론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백선남 장군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묘도 한적한 곳에 자리해서 있기에 그냥 평범한 사람의 묘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다. 조선군과 청군은 서로 전면전은 피한 채 한동안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으나 패배를 하면서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졌다. 이때 창원도호부사였던 백선남은 황시헌과 관병 및 의병 수백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남한산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광주 쌍령산 근처에서 군사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인조는 이를 슬퍼하며 백선남을 병조참판에 증직하고 이곳 김제 죽산면에 안장하고 운룡비와 그 일대의 토지를 하사하였다. 묘의 앞에 남아 있는 운룡비도 마모가 심하고 무신상 역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묘소가 확실하다고 한다. 

백선남은 1581년 (선조 14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창원부사 겸 전라좌수사까지 올라갔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가서 인조를 구하고자 출정했던 창원도호부사 백선남 장군묘는 김제시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4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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