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스토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Jan 31. 2016

사람의 운세란

점은 미신인가 신뢰인가.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믿던 안 믿든 간에 점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알게 모르게 운세를 보는 사람까지 치면 국민의 상당수는 점을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을 보는 이유는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기도 하고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점을 보지 않는다. 그 순간의 생존이 중요한 동물들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문에 본능이 발달되어 있고 온갖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인간보다 더 빨리 느끼게 된다.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지성이 발달하고 문명을 이룩했지만 본능은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본능 때문인지 몰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을 무언가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원전부터 전 세계 사람들은 믿음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아왔다. 샤머니즘이니 토테미즘이니 하는 것들은 초기 종교의 형태를 취하며 씨족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 솟대는 샤머니즘의 대표적인 사례다. 솟대의 기원은 먼 샤먼의 신앙까지 올라가는데 시베리아의 샤먼 역시 그들의 신앙에는 솟대가 있다. 위대한 신수 앞에 긴 소나무 장대가 있고 그곳에서는 물오리 아홉 마리가 비상한다. 시베리아 샤먼의 행사를 시작할 때 새의 모양이 있는 옷을 입는다. 샤먼이 죽으면 새가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새를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새는 집과 마을을 지켜주며 망자의 영혼이기도 한다. 때로는 새를 조상신으로 섬기기도 한다. 고구려 문양의 삼족오도 이 같은 문화가 반영된 결과이다. 지금도 대통령의 문양에 봉황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것은 꿈이었다. 그래서 한민족도 선사시대부터 새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고구려의 삼족오, 박혁거세가 태어난 신화의 중심에도 알이 있다. 충청남도의 백제토성을 복원할 때 나무로 깎은 새가 발굴된 경우도 많다. 


단군신화에서도 신단과 신수가 결합된 신단수의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통로에 세워진 나무가 있다. 논산 명재고택처럼 솟대가 세워지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마을공동체 문화의 발흥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다. 보통은 이처럼 유력 가문이나 마을 입구에 홀로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하당 신, 상당 신, 주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신앙이 자리하던 한반도는 조선말과 일제 강압기를 거치면서 종교는 이상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고대국가인 가야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으로 내려오던 고유의 신앙 문화는 깨끗이 지워지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천주교, 불교신자로 정리되었다. 


종교는 원래 삶의 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출발했지만 지금 한국의 종교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대도시에 가면 기독교를 믿으라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안달이 나있다. 주변의 불우이웃을 도와주기 위해 순수하게 단돈 10,000원을 낼 의지는 없지만 사후에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간절하게 권한다. 


무속신앙은 한민족의 오래된 삶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일제 강압 시기를 지나면서 무속신앙은 깡그리 무너졌지만 암암리에 그 흔적은 이어져왔다. 한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던 신앙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흔히 무당으로 대변되는 무속신앙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묘하면서 왜곡된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 틈새를 노리는 선무당들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갔다. 전혀 관계없는 비싼 굿을 한다던지 효험 같은 것이 없는 부적을 비싼 값으로 팔았다. 


일본은 기독교가 자리잡지 못한 국가 중 하나다. 종교도 엄청나게 많고 지역마다 혹은 집안마다 조상신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믿음의 대상이 존재한다. 흔히 일본을 국가적으로 통일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너무나 많은 관점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관심도 제각각이다. 혐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중 극히 일부일 뿐이지 한국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한국은 불행하게도 일본에 의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신앙은 깨끗이 지워졌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종교는 강요되었고 집단화되었다.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소외되었다. 종교가 삶의 철학이나 신앙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나와 다른 누군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특정 대상을 믿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지만 한반도에 내려온 수천 년의 민간신앙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을 보고 운세를 반신반의하면서 믿는 것을 알게 모르게 하지만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운세는 예측되어질 수는 있지만 확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내일, 한 달, 1년, 사후를 보장해주지 않지만 보장해준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 


다양한 믿음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는 신뢰감을 형성하고 그 틈새를 노린 사기꾼들을 줄일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뢰는 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