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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9. 2020

길을 따르다.

조헌의 옥천 후율당

누군가를 본받고 따르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족할 때가 있다. 인생은 선택에 따라 길이 갈라진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느냐에 따라갈 수 있는 길의 선택지와 폭이 달라지게 된다. 율곡 이이는 수많은 성리학자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옥천에 무덤이 있는 중봉 조헌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옥천 안내면 도이리에 가면 충청북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후율당이라는 서실이 있다. 이 서실은 조헌이 선조 21년(1588)에 지은 건물로 율곡 이이의 뒤를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 룰 후율이라고 했는데 그 호를 그대로 따서 후율정사라 하였으며 뒤에 후율당이라고 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처음에는 용촌리 밤티에 세워 후학을 기르고 자신의 학문을 닦으면서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제자들과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렇지만 영규대사와 다시 금산전투에서 왜군에게 700 의병은 모두 순절하였으며 지금은 칠백의총으로 그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옥천 후율당은 용촌리에서 철종 5년(1854)에 백운동에 옮겼다가 고종 1년(1864)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1977년에 중수한 후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누군가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후율당 안에는 조헌의 충신문과 아들 완기의 효자 정문이 남아 있다. 조헌의 자는 여식 호는 중봉, 도원, 후율이며 본관은 배천이었다. 서인이었던 그는 동인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다가 이곳에 와 있을 때 서실을 지은 것으로 그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도 배향되고 있다. 


날이 좋을 때 옥천 후율당을 찾았다.  여러 번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가기도 했던 조헌은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기도 했었다.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을 것을 제안하였으며 동시대의 율곡 이이의 학문을 따라갔던 사람이었다. 율곡 이이의 학문을 잇는다 할 만큼 학식이 뛰어났으나 실천하지 않는 학문에는 가치가 없다 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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