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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흥망(興亡)

광복 제75주년을 맞아 강경을 만나다.

2020년 광복절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75주년이 되는 해다. 오랜 일제 강점기간 한반도는 일본에게 전 국토가 그들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의해 도시가 만들어지고 미곡이 강탈당했다. 논산의 끝자락에 자리한 강경은 군산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 급속하게 발달하게 된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할 뿐이다.’ 힘이 없으면 정의를 아무리 외쳐도 의미가 없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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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은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교역의 장이 섰던 곳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도시로서 빠른 발전을 하게 된다. 일제는 군산에 본국에서 실어오는 공업제품과 조선에서 수탈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째보선창을 확장하고, 선창까지 철로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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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에는 한때 젓갈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던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포구 노동자들의 근거지였던 옛 강경 노동조합을 비롯해 옛 연수당 건재 약방 등이 만들어지고 최신식 도정공장을 4개를 짓고 도정한 쌀을 일본으로 보냈다. 강경에 터를 잡은 일본 상인은 1,500여 명까지 늘어 서창동, 중앙동, 염참동 일대에 근대식 건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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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근대문화유산을 찾다 보면 그 시대의 삶을 아주 조금 엿볼 수 있다. 강경을 중심으로 수 백리 밖 비옥한 평야에서 나오는 온갖 곡물을 실어 날랐고 내륙으로 어물과 소금을 공급하면서 큰 교역 도시로 발달했던 곳이어서 일제에게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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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에 도정공장이 지어진 것은 군산에 자리한 미두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두장은 지금으로 말하면 미래의 수요를 예측하여 거래하는 선물거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조선의 수많은 지주들이 이때 몰락했다. 누군가는 제한적인 정보하에서 조선인이 돈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한탕주의와 더 많은 것을 꿈꾸었던 탐욕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논산과 서천, 김제, 군산 등은 대표적인 곡창지대여서 막 공업화에 들어선 일본인들에게 필요한 쌀을 수탈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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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은 지금 근대문화유산을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젓갈로만 알려진 강경을 넘어서 근대문화유산을 만나고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만나는 곳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당시 미두장에서 쌀의 선물거래 가격은 오사카의 시세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체계적으로 접근했던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들은 미신과 감에만 의존하여 마치 도박처럼 접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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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장에서 한탕을 해서 크게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겠다는 지주들은 논산, 군산, 서천, 김제를 가리지 않고 군산 미두장에 뛰어들었다. 강경에도 교역으로 어느 정도의 부를 얻은 조선인들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화려함을 뒤로한 채 지금은 한적한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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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장마의 끝자락에서 날이 좋아진 덕분에 정말 뜨거운 태양 속에서 걸었다. 괜히 검은 옷을 입고 나왔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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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은 충남에서 가장 먼저 우체국과 호텔이 문을 열었고, 화력발전소가 건설돼 전기가 공급된 곳이었다. 우체국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공간은 주막이나 양반들의 고택의 사랑채뿐이 없었을 때 호텔은 어떻게 보였을까. 당시 미두장은 오늘날의 주식거래와 매우 유사하다. 일확천금을 꿈꾸면 꿈꿀수록 빠르게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가치가 아닌 돈에 목을 매기 때문이다. 돈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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