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ug 25. 2020

8월의 마지막 전시

백제 금동신발, 1,000리를 가다. 

전국의 국립공주박물관과 같은 공공시설에서 진행되는 기획전시전은 23일부로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으며 언제 개재가 될지 알 수가 없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백제 금동신발, 1,000리를 가다는 기획전시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만나볼 수 없다. 

박물관 기획전시 공간은 1부, 2부, 3부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한성백제 시기 지배력 확대를 위해 지방 세력에 내려준 금동신발을 전시하고, 2부에서는 백제가 영산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한 시기의 금동신발을 보여준다. 3부에서는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제의 세력이 있었던 화성,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공주 무령왕릉, 고창 봉덕리, 고흥 길두리, 나주 복암리, 익산 임정리, 세종 나성동 등에서 모두 백제 금동신발 출토가 되었다고 한다. 

신발은 지역마다 역사마다 다른 형태로 진화를 해왔다. 네덜란드와 일본과 같은 경우 물이 항상 있었던 곳이라서 나무로 만든 나막신이 자연스럽게 발달하였다. 역사 속에서 시대 지역에서 신발은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기능뿐 아니라 그 사람의 신분 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왔다. 

궁남지에서 출토된 짚신을 보면 앞쪽 반이 접힌 채 출토되어 짚신의 뒷면을 볼 수 있는데 부들로 짚신을 만드는 것은 백제 짚신의 특징이다. 

신발이라는 것은 발을 보호하기도 하면서 다른 동물과 달리 척박한 땅과 차가운 눈 등 거친 환경에서 발을 보호해주었으며 인간을 멀리까지 이동하여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해 주었다. 백제 부여 능산리 유적 같은 곳에서는 나무신도 출토가 되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백제 금동신발로 3장의 금동판, 좌측판, 우측판, 바닥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좌측판과 우측판을 발등과 뒤꿈치에서 못으로 고정하여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금동신발을 신으려면 폭신한 덧신을 신어야 가능할 듯 하다. 

금동신발에 탈부착으로 할 수 있는 철제 못 신은 신발 밑창에 붙여 사용하는 신발 부속구로 미끄럼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딱 보아도 지금의 아이젠과 비슷한 모습으로 사람의 무게를 견디기에 충분한 강도의 철제 못신이었다고 한다. 

3단계가 되면 필수만을 제외하고 모두 닫아야 되기 때문에 실업률의 급등뿐만이 아니라 경제의 타격도 심할 수밖에 없다. 마이너스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정부가 '전국적 대유행' 가능성을 우려해 그동안 수도권에 적용하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이날부터 전국으로 확대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밀집도가 높은 수도권부터 3단계 먼저 올리고, 지방 격상에도 대비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아무튼 우리는 밥을 먹는 것보다 마스크를 쓰는 것이 필수인 시대를 살고 있다. 현명한 사람은 단번에 진실의 길로 돌아가지만 나약한 사람은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져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빛공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