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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2. 2020

같은 성씨 (世居地)

음성 오궁리 동족촌

꽃을 찾아 날아온 나비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음성의 오궁리 동족촌이라는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평산 신 씨가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곳으로 흔히 말해서 평산 신 씨 세거지라고 알려진 곳이다.  평산 신 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의 22대손 제천 현감 신항구(申恒耈)는 퇴관 후 효종 때 감곡면 오궁리 아래 오갑에 와서 살게 되면서 음성 평산 신 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음성 햇사레  복숭아로 유명한 고장 감곡면의 안쪽에 들어오면 평산 신 씨가 이곳에 세거 하면서 살았다는 비와 함께 그 유래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마을의 북쪽으로는 오갑산(609.4m)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오갑천(사곡천)이 서쪽의 응천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에는 신후재 영정을 봉안한 규정영당이 있고, 영당 앞으로 백련서재와 백련이 피는 영당연못이 남아 있다. 

작은 공원에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모두 평산신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신항구의 아들인 신후재가 1694년(숙종 20) 3월 갑술옥사로 유배 3년이 정해져 경기도 여주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 4월에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아래오갑으로 돌아와 백련서재(白蓮書齋)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련서재라는 말은 바로 하얀 연꽃이 있는 연못앞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원래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작은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21 세손이며, 제정공 신효창의 7세손인 신겸(申謙)이 16세기 중엽에 군산시의 옥구라는 지역에 자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언제 이곳을 왔었는지 다시 생각으로 돌아가 본다. 연지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면 본관은 평산.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인 신후재는 사은겸진주주청부사(謝恩兼陳奏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강화부유수·개성부유수·한성부판윤을 지낸 신후재의 초상이 있는 영당이 나온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서인(西人)에 의해 여주(驪州)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 석방된 후 이곳으로 내려와서 제자들을 길러낸다. 갑술옥사는 그 유명한 장희빈을 끌어내리게 된 사건이다. 숙종이 인현왕후 민 씨의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이에 앞장섰던 남인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남인 측은 민암·이의징 등이 사약을 받았고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 등이 유배당하였는데 이때 신후재도 유배가 된다. 그 뒤 남인은 다시는 정권을 잡을 수 없었으며 사약을 받았던 우암 송시열도 복권된다.

사람의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모르는 듯하다. 신후재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정원 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며 진주주청사(謝恩兼陳奏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92년 도승지·강화유수·개성유수 등을 거쳐 이듬해 한성판윤을 역임하였지만 2년 뒤에 유배되었다가 음성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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