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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4. 2020

신념 vs 권세

진천 금성대군 사당

세종에게는 유독 재능이 많은 아들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길은 모두 달랐다. 첫째 아들이자 자신을 도와 훈민정음 등을 만들었던 문종을 비롯하여 수양대군, 안평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임영대군, 평원 대군, 영응대군뿐만이 아니라 빈의 자식들까지 적지 않았다. 세종은 자신의 아들들의 성품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손자인 단종을 데리고 젊은 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경들에게 부탁할 말이 있소. 이 아이는 골격이 빼어나고 지혜가 총명하여 가히 쓸만한 성품이므로, 특히 경들에게 당부하는 터이니 후일 나의 오늘 이 부탁을 부디 저버리지 말아 주오.”

진천군에 가면 세종의 아들이었으며 단종을 보호하려고 했던 금성대군 사우가 있다. 그는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서도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여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세종의 소현왕후 심 씨의 아들로 제명대로 산 사람이 많지 않다. 평원 대군은 학문에 진력하며 성품이 겸손하였으나 1445년 1월 두창(痘瘡: 천연두)으로 죽었으며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은 형에게 죽음을 당했다. 세종의 서자였던 한남군, 영풍군, 수춘군 역시 제명에 살지 못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원래 군호가 ‘진양(晉陽)’이었는데  1445년, 아버지 세종이 ‘수양(首陽)’으로 고치게 하였다.  수양대군은 형 문종이 뛰어났지만 몸이 약했음을 알고 있기에 문종 재위 기간에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어린 조카가 즉위하자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영조대에 복권이 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靑安)의 향사(鄕祠)에 제향 되었다. 

진천 금성대군 사당은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천 금성대군 사당은 초평면 용기리에 세거 하던 금성대군의 후손들이 1740년(영조 16)에 창건하였으며, 1974년에 삼문과 담장을 중건하였다. 사당은 청당 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반 칸의 앞퇴를 두었다.

옆에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용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진천 금성대군 사당은 1990년 12월 14일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신념과 권세 혹은 돈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의심이 들 때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모든 의구심들이 사라지고 명확해진다고 한다. 금성대군이 일어나려고 했던 순흥은 역적의 땅이 되었으며 금성대군 신단이 남아 있다. 금성대군은 안동부 관아에서 사사되었는데 후에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밝혀지지도 않았으며 무덤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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