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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4. 2020

자인고비(慈仁考碑)

음성의 조인옥과 조륵의 이야기 

음성의 금왕읍이라는 지역에는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조인옥이 있었으며 돈을 아끼고 아껴서 재산을 나누어 진휼하니, 호남과 영남 양도의 굶주린 백성 만여 명이 구제한 조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위화도 회군에서 큰 공을 세워 토지와 가택(家宅)을 받았고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회군 공신이 된 조인옥은 1373년(공민왕 22)에 음보(蔭補)로 생원이 되고 1387년(우왕 13)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의 휘하에 종군하여 최영(崔塋) 등 구세력 숙청에 가담하였다. 

우선 고려 후기 조선 전기의 문신인 조인옥을 모셨다는 충정사를 먼저 찾아가 보았다. 조인옥은 고려말 정몽주 등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으나 결국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공신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고 개국 1등공신에 올랐다.

조인옥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산리에 묘소가 있으며, 부조묘는 충정사(忠靖祠)라 하여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다. 평소 사서(史書)를 즐겨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사대부가 많이 따랐으며  허튼 말이 없고 희노(喜怒)의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크지는 않은 사당이지만 조인옥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지조가 높고 단단함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는데  신진 사대부 세력으로서 유교주의 정신에 철저했던 인물이었다. 

보통 자린고비라고 하면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큰 편이다.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도변에서 자린고비 조륵 선생 유래비를 보고 원래 알고 있었던 자린고비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이미지와는 조금 결이 달랐다. 

자인고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소재한 신덕저수지 근처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저수지에 잠겨 고증할 길이 없다고 하나 자린고비 조륵 선생 유래비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다. 평생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쓸 때는 썼으며 이에 지방민이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고 관청과 향리 등에서 서로 표창하여 칭송하고 임금이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는 요즘 꼭 사야 될 것만 사고 지갑을 닫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는 말이 있다. 돈을 쓸 때는 잘 써야 하지만 그것이 과시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자린고비(玼吝考妣)의 ‘자린’은 ‘기름에 절인 종이’에서 ‘절인’의 소리만 취한 한자어이고 ‘고비(考妣)’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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