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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5. 2020

준비하는 일

조선시대의 마지막 향교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걸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이 괜찮으면 굳이 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예상치도 못한 일이 발생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의 의료현실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게 된다. 메르스 때 일부 준비는 했지만 음압병실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와 발생할 때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코로나 19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팬데믹으로 퍼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전국에 자리한 향교들은 대부분은 오래전에 만들어졌지만 보령의 오천향교는 근대/개항기인 1901년에 만들어졌다. 사실 이곳은 강학의 기능은 거의 없고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향교다. 

삶을 되돌아보면 항상 10년 뒤를 생각하면서 현재에 충실한 길을 걸었다. 사람은 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무너지면 방황이라는 상태에 이른다. 정착이라는 것은 순환할 수 있는 틀을 정했다는 것이지만 틀이 유연하지 않으면 외부의 위기에 쉽게 무너지게 된다. 세상은 매일매일 바뀌며 수없이 많은 사건을 만들어가는데 이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아마 전국에 있는 향교 중에 외삼문을 들어가자마자 대성전이 있는 곳은 이곳 오천향교뿐이 없을 것이다. 오천향교의 역사만큼이나 이곳에 있는 필사본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다. 청금록과 서재유안 정도가 유일하고 의미 있는 소장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천향교는 1895년 오천의 충청수군절도사영이 폐영되고 1901년 오천군이 생기면서 고을에 향교를 건립하기 위해 유림과 군수가 힘을 합쳐서 만들어졌다. 

유생들이 머무를 수 있는 동재나 서재도 없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도 없다. 큰 향교의 입구에 있는 누각과 같은 건물도 없이 오로지 제사를 위한 공간과 건물들만 자리하고 있다. 향교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 성과 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 

향교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서 향교가 지어진 1901년부터 지금까지 향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들을 볼 수 있다. 향교는 정치적인 성향도 띠고 있는데  중앙 세력의 대표 격인 수령은 호구의 조사, 조세의 부과, 군적의 편성 등 정치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지방 지식인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오천향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전까지 10년 동안 오천지역의 정치적 구심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자는 일을 함에 있어 무작정 빨리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빨리 하려고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려 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시간의 힘은 있다. 시간의 방향이 어디로 흐르게 할지는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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