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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6. 2020

사람의 운

이몽학의 난을 진압했던 이시발의 묘

사람의 운이란 방향성이 있는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한가운데 살짝 도와주는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묘함에 있어서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기에 노력에 앞서 운에 기대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상의 묏자리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어떤 가문은 대를 이어 좋은 자리에 올라 명예와 부를 가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인물들의 묘를 살펴보면 그 기운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진천에 가면 1569년 성균진사 오촌공(梧村公 ) 대건(大建)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조 22년(1589) 增廣試(증광시) 丙科(병과) 8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임진왜란 발발로 接伴官(접반관)이 되어 경주에서 명나라 장군 駱尙志(낙상지)를 접대하였고 都體察使(도체찰사) 柳成龍(유성룡)의 종사관으로도 활동했던 이시발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양지바른 곳에 앞이 탁 트인 곳에 자리한 이시발의 묘는 시원스럽다. 벽오공의 묘소는 1626년 별세하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 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분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기도 했던 이몽학과 이시발의 인연은 악연이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6년을 그린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차승원이 이몽학을 연기하였다. 

묘의 앞에는 정헌대부 형조참판 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이공시발지묘 (定憲大夫刑曹參判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李公時發之墓)라고 쓰여 있으며 증 정경부인 여흥 민 씨 부좌(贈 貞敬夫人驪興民氏祔左)라 새겨져 있다. 이시발은 사후 다시 영의정으로 추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그는 난을 제압하는 것으로 기회를 얻었다. 이몽학의 난을 제압했으며 인조를 위협했던 이괄의 난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사람의 운은 사물의 뜻을 명확하게 아는데에 달려 있다. 사물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처세에 사용하든 인격수양에 사용하든 간에 사용처는 널리 열려 있다. 알고 행하게 되면 삶의 작용은 더욱 위대해질 수가 있다. 

약수로 유명한 진천 초평에는 이 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시발의 묘를 이곳에 이장한 아들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번성하여서  그 일족에게 초평이씨(草坪李氏)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그의 묘에는 1658년(효종 9) 예조참판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을 호조참판 송준길(宋浚吉)이 행서로 쓰고, 승정원좌승지 이정영(李正英)이 두전(頭篆)한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진천 이시발 신도비는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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