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를 짓다.

인종의 편에 섰던 송인의 흔적

굽지 않아도 맛있는 생선은 어떤 것이 있을까. 백제에 불교가 전파된 곳이면서 선물로 주면 생색을 낼 수 있는 생선의 이름은 법성포에서 지어졌다. 난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면했던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장인이었기에 가능했었다. 이자겸은 왕이 되려던 꿈은 실패했지만 자신의 명대로 살 수는 있었다. 멀리 법성포까지 가서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바닷바람을 쐬어 가며 꼬들꼬들하게 말린 생선을 먹었는데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너무나 맛있어서 이름을 물었더니, 어부들 모두가 이름을 대지 못했는데 귀양을 살고 있지만, 결코 ‘비굴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의미에서 무명 고기에게 ‘굴비’라는 이름을 붙여 줬는데 한자로 쓰면 ‘屈(굽을 굴) 非(아닐 비)’다.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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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후대가 평가하고 역사를 기록한다. 진천의 충북혁신도시에는 이자겸의 난 때 죽음을 당한 송인의 묘가 있다. 그는 고려 인종을 모시고 피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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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 공원은 역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가을에 걸어보기에도 좋은 곳이기도 하다. 1122년 예종 임금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맏아들 왕해(王楷)가 열네 살 어린 나이로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 사람이 고려 제17대 임금 인종인데 많은 동생들 중 예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 덕택에 왕 자리는 왕해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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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 공원에는 상산재라는 재실이 있으며 진천 송 씨의 중시조인 송인 장군의 묘는 여느 무덤과 달리 직사각형의 봉분에 긴 돌을 깎아 두른 것이 독특하다. 진천 송 씨 시조인 송인의 9대손인 송석 동은 단종의 복위 운동 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세상을 떠날 때 3 부자가 순절하였는데 이들의 희생을 충절수가 상징하는 충절수에도 단풍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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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자기 가문의 피에 다른 가문의 피가 섞이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 고려왕실에서는 근친혼을 선호했다.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이 인종에게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해괴망측한 일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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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권력욕때문이었다. 권력을 쥐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던 이자겸은 결국 난을 일으킨다. 이자겸의 난에 의해 거사가 실패했다고 느낀 인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기겠다고 선포했다. 척준경이 인종을 호위하던 진천군의 무신 송인을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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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진천 송 씨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송인(宋仁)[?~1126]은 지금의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두루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아들로 송원겸(宋元謙), 손자로 송순(宋恂)·송희(宋憘)·송국첨(宋國瞻)을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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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가 붉게 물든 것이 마치 송인의 이야기를 보는 것만 같다. 이자겸의 난은 고려 전기를 이끌던 문벌 귀족 세력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집단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표적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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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의 묘에는 조금은 독특한 문인상 등이 세워져 있다. 고려시대 문벌 귀족의 부귀영화가 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자겸의 난 이후로도 문벌 귀족은 자신의 권세를 확대 강화하며 고려 정치를 좌지우지했지만, 40여 년 뒤에 발생한 무신정변으로 무신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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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천수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끝없이 달려가다 법성포에서 굴비라는 이름을 지었던 이자겸의 평가는 박하지만 진천에 묘소가 있는 송인은 충절의 표상으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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