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왕의 태실지를 찾아서
요즘의 한국사회나 자신의 인생을 자조하듯이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20대에는 답이 없다, 30대에는 집이 없다, 40대에는 나는 없다, 50대에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보면 휩쓸려간 것 외에 삶에서 무엇을 결정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결정권이 있었을 것 같은 사람은 왕이었다. 한 국가의 운명에서 중요했던 것이 왕이었기에 태어나면 태실을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에 묻었다. 이것이 태실과 태실비다.
공주시에 있는 봉정 교차로를 지나가면 태봉 교차로가 나온다. 태봉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태봉동 입구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태봉산이 있고 그 정상에 숙종대왕 태실비가 자리하고 있다. 태봉산이라고 해서 큰 산은 아니고 낮은 야산 정도다.
공주 하면 밤이 유명하듯이 곳곳의 산에는 밤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부분의 밤들은 모두 수확하고 일부 떨어진 밤들도 눈에 뜨인다. 지금 공주의 국도를 가면 올해 생산된 햇밤들을 볼 만나볼 수 있다.
떨어진 대부분의 밤들은 알이 없거나 벌레가 먹은 것이 대부분이다. 1661년 숙종이 태어났을 때 풍수지리적으로 명산을 찾아 공주에 내려왔다가 바로 이 태봉산에 태를 묻었다고 한다. 태어나면 태실을 묻지만 왕으로 오르게 되면 태실 비등이 조성된다.
고종 대 숙종의 태는 경기도 양주로 이장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왕실의 기운을 끊기 위함이기도 했다. 숙종대왕 태실비는 원래 2기의 태실비가 1661년 (현종 2)과 1663년 (숙종 9)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숙종은 자신의 정치적인 행동보다 장희빈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왕이다.
멀리 나무들 사이로 태실비가 보이기 시작한다. 비의 앞면에는 '순치십팔년팔월십오일묘시생원자아지씨태실(順治十八年八月十五日卯時生元子阿只氏胎室)’이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순치십팔년십이월이십오일진시립(順治十八年十二月二十五日辰時立)’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의 왕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많은 것을 신하들에게 의지해야 했었다. 자신이 어떤 정책을 펼치려고 해도 신하를 설득할만한 명분을 내세우지 못하면 추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는 등 국가 재정구조를 개선하였지만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숙종은 자신의 힘으로 당파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한 영민한 왕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작지만 큰 변화다. 힘들게 올라갔다오면서 밤을 두 알 주어서 내려왔다. 필자 손에 밤 두 개가 더 가치가 있는 날이다.
숙종대왕 태실비를 내려오고 국도변으로 나오니 마을 유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태봉마을은 태봉동(胎封洞)이라는 마을의 유래다. 태봉동은 태봉산(胎封山)이 있어 유래된 지명으로, 태봉초등학교를 비롯해 마을 곳곳에서 태봉(胎封)과 관련한 지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