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다.

우암 송시열이 태어난 옥천군 이원면

이번 주에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그쪽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파이썬으로 구현하며 배우는 딥러닝 프레임워크다. 스마트폰이 손안에 혁명을 일으켰다면 나오게 될 스마트카는 생활 속의 혁명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 중심에 딥러닝도 있다. 딥러닝 프레임워크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미분 계산을 지원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문학의 비중과 가치가 작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흔히 공대 혹은 이과들이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문학과 수학적인 것을 다 아는 사람이 더 강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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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그냥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물질적인 기반과 도시와 체제 등이 바뀌었을 뿐 지금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즉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처세와 대응방법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이용하는 것과 편의성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옥천군 이원면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지정된 옥천 송시열 유허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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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11월 12일 이곳 구룡촌(九龍村)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여덟 살 때부터 친척인 송이창(宋爾昌)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대전 동춘당 송준길과 같이 자라나게 된다. 비신(碑身)의 높이 256㎝, 폭 63㎝, 두께 26㎝로 정조 때 세웠으며, 최근에 보호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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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그의 외가가 있었다. 송갑조와 선산 곽 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돈암서원에 배향된 김장생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기호학파에 속하며 주자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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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촌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곳에 용과 관련된 전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말이 적었지만 학문적인 문제나 이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이야기는 도도했고 흐르고 또 흘러 그칠 줄을 못랐다고 한다. 그의 호가 우암이 된 것은 김익회가 그의 허물을 이야기하면서 '허물 우'를 넣어 호를 삼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자 우암은 좋은 호라면 내가 사양해야겠지만 좋지 못한 호를 어찌 사양하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호를 우암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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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유배생활도 적지 않게 했는데 화양계곡이 있는 화양동에 그의 넋이 신화가 되어 남게 된다. 충절을 이야기했던 우암 송시열은 제주에 유배된 후 1689년 서울로 압송되던 중 6월 8일 전북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는 죽음으로서 더욱더 큰 영예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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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여러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길은 학문에 있었고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존경하고 따르라는 증주벽림처럼 큰 벽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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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이원면은 묘목으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용방리에 유허비가 있으니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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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부근에 비로는 이원면 백지리에 옥천 김문기 유허비(金文起遺墟碑, 충청북도 기념물 제44호), 용방리에 송시열의 유허비인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이원리에 창주서원 묘정비(충청북도 기념물 제105호)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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