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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0. 2020

역사에 남다.

우암 송시열이 태어난 옥천군 이원면

이번 주에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그쪽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파이썬으로 구현하며 배우는 딥러닝 프레임워크다. 스마트폰이 손안에 혁명을 일으켰다면 나오게 될 스마트카는 생활 속의 혁명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 중심에 딥러닝도 있다. 딥러닝 프레임워크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미분 계산을 지원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문학의 비중과 가치가 작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흔히 공대 혹은 이과들이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문학과 수학적인 것을 다 아는 사람이 더 강점이 있다. 

역사는 그냥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물질적인 기반과 도시와 체제 등이 바뀌었을 뿐 지금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즉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처세와 대응방법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이용하는 것과 편의성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옥천군 이원면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지정된 옥천 송시열 유허비가 남아 있다. 

1607년 11월 12일 이곳 구룡촌(九龍村)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여덟 살 때부터 친척인 송이창(宋爾昌)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대전 동춘당 송준길과 같이 자라나게 된다. 비신(碑身)의 높이 256㎝, 폭 63㎝, 두께 26㎝로 정조 때 세웠으며, 최근에 보호각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그의 외가가 있었다. 송갑조와 선산 곽 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돈암서원에 배향된 김장생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기호학파에 속하며 주자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다. 

구룡촌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곳에 용과 관련된 전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말이 적었지만 학문적인 문제나 이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이야기는 도도했고 흐르고 또 흘러 그칠 줄을 못랐다고 한다. 그의 호가 우암이 된 것은 김익회가 그의 허물을 이야기하면서 '허물 우'를 넣어 호를 삼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자 우암은 좋은 호라면 내가 사양해야겠지만 좋지 못한 호를 어찌 사양하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호를 우암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유배생활도 적지 않게 했는데 화양계곡이 있는 화양동에 그의 넋이 신화가 되어 남게 된다. 충절을 이야기했던 우암 송시열은 제주에 유배된 후 1689년 서울로 압송되던 중 6월 8일 전북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는 죽음으로서 더욱더 큰 영예를 누리게 된다. 

후대에 여러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길은 학문에 있었고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존경하고 따르라는 증주벽림처럼 큰 벽이 되었다고 한다. 

옥천의 이원면은 묘목으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용방리에 유허비가 있으니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다. 

이곳 부근에 비로는 이원면 백지리에 옥천 김문기 유허비(金文起遺墟碑, 충청북도 기념물 제44호), 용방리에 송시열의 유허비인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이원리에 창주서원 묘정비(충청북도 기념물 제105호)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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