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지 않는 소녀
문득 궁금해졌다. 한 사람과 얼마나 오래 이야기할 수 있는지 혹은 전원은 꺼도 되는지 등등 세상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우리는 왜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유일하게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판단하는 것은 이 순간이다. 아마 내일도 살아있을 확률은 높겠지만 100%는 아니다.
"저보다 오래 살아보셨잖아요. 시간이 참 빠른가요. 아니면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나이가 드셨다고 느끼시나요?" 그녀라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몇 살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사회예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나 입사할 나이와 퇴사할 나이를 정해놓으면 사회가 가진 자원을 측정하기가 쉬워지거든요. 나이는 그냥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숫자일 뿐이에요. 특히 여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소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여자는 항상 소녀라고 하잖아요."
"예 저도 들어본 적은 있어요. 보통은 소녀라고 하면 어리고 풋풋한 앳된 외모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나이가 들어서 주름살도 많이 생기고 몸에도 살이 찌고 아름답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소녀라고 하는가 궁금했거든요." 라디오의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말하는 소녀는 마음에 가까워요. 남자는 자신이 어린 걸 모른 채 나이를 먹어가고 여자는 소녀 같은 마음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거예요. 그걸 알았을 때 남자는 애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노래의 가사처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도 아니고 남자는 애 여자는 소녀라는 색다른 이야기처럼 들렸다. 확실하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조금은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궁금한 것이 묻고 싶어 졌다. 최근에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애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행복하려면 연애나 결혼을 해야 할까요? 결혼을 해보셨을 테니 연애와 결혼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연애할 때가 좋았나요. 결혼을 하고 나서가 좋았나요?"
"질문이 많으시네요. 젊으니까 고민도 많으실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연애는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예고편이고 결혼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본편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거예요. 재미없는 예고편도 있지만 대부분의 예고편이 아주 재미있을 것처럼 편집하잖아요. 좋은 것만 상상하는 거죠. 예고편만을 보고 극장을 찾을 때는 돈 아깝다는 생각을 하기 위해 찾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그럴듯했다. "그런 것 같아요. 연애는 좋긴 한데 결혼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꼭 좋은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서로가 예고편을 생각하면서 살 때 충돌이 일어나요. 진짜 연애는 결혼하고 나서 시작되는 거예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때부터 만들어가는 거예요. 지금까지 보았던 예고편은 잊어버리고 본편만 생각해야 관계가 좋아질 수가 있어요. 예고편은 아주 잘 만들어진 낚시 영상이에요. 남자나 여자나 모두 예고편에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역시 연륜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점과 생각이 한 번에 정리되는 것만 같았다. "아~ 그러니까 짧은 예고편에서는 가능했지만 긴 상영시간의 인생에서는 항상 그럴 수는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도 살아보니까 남편이 이래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요. 자신의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제가 그 남자의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빨라요." "아 사람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되는 거군요.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성향이니까요." 조금씩 라디오가 지지직 거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너머의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끊기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50년 전이었던가요?.... 지지직...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지지직... 한 사람이 작사를 하고 그 가사를 담는... 지지직... 특별한 인생 하모니가 남자와 여자의 결혼 같은 거예요." 지지직...
"저 잘 안 들려요. 그런데 50년이라고요. 그 영화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닌데요." 라디오 건너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그냥 잡음처럼 들리는 소리만 계속 이어졌다. 채널을 계속 바꾸어보았지만 다시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공허해졌지만 집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서 먹고 간단히 산책을 한 후 돌아와서 다시 라디오를 돌렸지만 여전히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그러던중 또 다른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