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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31. 2021

영혼이 원하는 길

사람이 내면 속의 영혼이 원하는 대로 이끄는 길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말로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지옥의 림보에서 자꾸 그 시간을 리플레이하면서 기억하게 한다. 요 며칠 너무나 아프고 지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영혼이 원했던 길로 가라는 메시지를 외면하면서 지난 몇 년을 살았다.


치과에서 사랑니도 빼본 적이 있지만 그건 잠시일 뿐 이렇게 고통스러운 처음이다. 속에서는 위장 경련으로 끊임없이 떨어대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식은땀이 나고 목에는 상처가 있는지 한 번 기침이 나면 배 근육에 긴장이 생길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심장은 쥐어뜯는 것 같고 몸의 전체 근육에서는 나오는 물질로 근육통은 잠을 재우지 않았는데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았는데 알 수 없는 도형과 이야기들이 가득 차 넘친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통장에 숫자로 표시된 것들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되묻고 되물었다. 얼마가 있어야 충분한가. 한 달에 얼마를 쓰면 되는가. 1년까지 버틸 수 있나. 아니 3년은? 꼭 넘쳐나지는 않아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그 금액 말이다. 원하는 글보다는 사실 타협하는 글을 쓰며 버텨왔다. 통장의 숫자를 위해서였지만 정직하고 바른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미래의 틈새를 보여주기 위해 타협을 한 것도 있지만 상처 받았던 영혼은 꿈틀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그 상처로 받은 분노가 흘러넘쳤다. 당신의 영혼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걷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겠다면서 말이다. 우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서 이유를 찾았다. 그런데 이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술로 잠재웠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 조금만 정신이 돌아오면 다시 폭주했다. 지난 시간 동안 그토록 싫어했던 길을 걸었던 나와 너무 가까웠던 사람들의 일관성 없음을 분노했다. 남탓을 증오하면서 잠시의 남탓으로도 벗어나려고도 했지만 그 결과 챙피함만 길게 남았다. 남탓의 약발은 잠시일뿐 도망치려는 아이의 순수함은 없고 유약함만 남았다.


적지 않은 시간을 돌아왔지만 여전히 다시 그 길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면서 자신 인생의 가치 없음을 탓했다. 많은 사람들은 통장에 숫자를 중요시한다. 특히 물질만능주의에서는 어떤 사람을 재는 잣대처럼 생각한다. 그렇지만 물었다. 얼마가 있으면 당신의 영혼이 원하는 길을 걷겠습니까. 그 일관성이라는 잣대는 정작 본인은 지키고 있는가를 물어보 공정, 정의, 애착, 사랑 등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던 자신의 이중성을 못 견디는 건지도 모른다. 너도 똑같은 사람이면서 아닌척하면서 산거야.


꼴좋다. 월급장이보다 쪼금  많은 숫자를 모으는고 차에 만족하면서 버티더니 이럴줄 알았다. 어차피 용기가 없고 아플것 같아서 가지 못할길을 꿈꾸지 말고 살아라...아파서 더는 못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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