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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7. 2021

죄와 벌

우리는 어떤 정의를 꿈꾸는가. 

최근 아동학대로 사망한 정은이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와 공분의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은이를 대신하여 분노하듯이 살인죄를 적용해달라고 외치고 있다. 법치사회에서 죄를 지으면 벌(형량)이 내려지게 된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실상 죄와 벌은 절대 공평하지가 않다. 그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특정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게 되면 정은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어떤 죄에 대해 형량을 높임으로 확실하게 범죄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사기가 유일할 듯하다. 


사기는 자신이 범죄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면서 행하는 범죄다.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득보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형량이 확실히 높다는 것을 안다면 사기를 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사기죄는 OECD의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형량이 낮은 편이다. 라임이나 옵티머스 펀드 사태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자 그렇다면 정은이 부모는 자신들의 행동이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것을 인지하였을까. 마음속의 부담은 있을지 몰라도 그런 상태까지 가는 데에는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음주운전자체도 그렇다. 자신의 행동이 범죄행위라고는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나 술을 먹었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범죄행위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 편향에 놓이게 된다. 아무리 형량을 높여도 상습적인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원천적으로 차를 운전할 수 없도록 하는 제약이 걸리지 않는 이상 여전히 운전할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많은 가정폭력을 받는 대상은 바로 자신의 부모다. 심지어 그 부모들조차 어릴 때 학대했던 것을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부모라는 이름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필자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가정폭력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왜 가정폭력을 일삼고 그것을 그렇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금도 수많은 가정폭력을 일삼는 부모들이 정은이 사건을 보고 반면교사로 큰 형벌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행동을 자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은이 사건을 양부모를 살인죄를 적용하고 엄벌에 처해달라는 좁은 시각으로 보면 문제는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가 왜? 소유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과 힘이 없는 사람, 균형 있는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여전히 각자도생의 삶 속에서 아이들은 희생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힘이 없어진 노년이 되면 아무렇지 않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 때 받은 가정폭력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냥 덮고 살아갈 뿐이다. 아이 때 받은 정신적인 상처는 어떤 방식으로 든 간에 드러난다. 정상적인 관계 형성이나 연애를 하기 힘들던가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의 정은이의 사망사건은 물질만능주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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