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pr 01. 2021

명탄(鳴灘)

충절을 지킨 형제 이명성, 이명덕

지금은 공주지역이지만 옛날에는 연기군 지역에 창건했던 명탄서원이라는 곳이 있다. 국도를 지나가다가도 이정표를 보는 것과 동시에 입구를 못 찾는 곳이기도 하다. 명탄(鳴灘)에서 탄은 대전광역시의 신탄진과 같은 한자를 사용하며 물이 얕고 빠르며 돌이 많아 배가 다니기에 위험한 곳을 의미하는데 강변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새가 우는 모습으로, 우는 기관(器官)을 강조한 것이 울 명이다. 

명탄서원과 같은 곳에 자리한 사송정은 공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월송동 아래 사송정 마을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정자가 있었던 날맹이라는 뜻의 장잣날이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의 8대 정자는 합강정독락정한림정탁금정금벽정사송정청풍정수북정을 말하지만 독락정한림정탁금정사송정금벽정만하루와 수북정팔괘정임리정을 말하기도 한다. 

이름을 남겼던 사람들을 보면 형제가 모두 학문의 길을 걸었던 경우가 많다. 형 이명성(李明誠, 생몰년 미상)의 호는 송은(松隱)으로 동생 이명덕과 함께 목은 이색의 제자이며 포은 정몽주와 각별한 사이였다. 형 이명성은 고려 왕조, 동생 이명덕은 조선 왕조에 충절을 보여주었다. 

고려 왕조에서 감무, 감찰어사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伊川)의 산중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동생 이명덕(李明德, 1373~1444)의 호는 사봉(沙峰)으로 1392년(태조 원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병조참판 등 중요 관직을 역임했다.

형제가 모두 이름을 날렸으나 다른 유학자에 비해 덜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명탄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31년(영조 7) 현재의 위치인 공주시 월송동에 옮겨 복원되었지만,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955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주에는 창벽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지금은 세종에 속하게 되었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여울 끝자락으로 수직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있는 절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작년까지 명탄서원에서는 ‘명탄서원 공주를 추로지향으로 꿈꾸다’, ‘숨어있는 역사 명탄서원(충절사) 다시보기’등 유교문화와 선비의 삶을 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하였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함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한다. 

마을분들만 가끔씩 보이는 이곳은 정말 조용한 곳이다. 국도가 없었을 때는 금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풍광이 꽤나 괜찮았을 것이다. 어질지 아니한 자는 오래 가난을 견디지 못하며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한다. 학문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국 신뢰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 모셔진 이명성은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동생 이명덕은 1444년(세종 26) 7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사후 우의정 증직과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조선시대 공주지역 각종 읍지류에 가장 먼저 기록되는 사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망적 편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