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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8. 2021

김제의 하루

과거로 돌아간 김제의 관아

과거에 김제군과 같은 곳에서 하루가 시작되면 지방행정의 치소였던 도시의 가장 중심인 관아의 근처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정처리와 일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으며 군수는 자신이 머물던 내아에서 나와 동헌에서 업무를 보았다. 김제군에는 동헌과 내아가 잘 보존되어 있는데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보존이 잘되어 있다. 

지금은 지방자치제로 군수까지는 국민들이 선출하지만 조선시대의 관료들은 왕이 임명하여 내려보냈는데 그 수가 329명으로 행정의 규모에 따라 부목군현으로 부(府) 4곳에는 부윤(府尹)이, 대도호부(大都護府) 4곳에는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가, 목(牧) 20곳에는 목사(牧使)가, 도호부(都護府) 44곳에는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군(郡) 82곳에는 군수(郡守)가, 현(縣) 175곳에는 현령(縣令)이 34명 그리고 현감(縣監)이 141명에 이르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옛 모습을 회복하여 이르고 있는 김제의 옛 관아의 모습이다. 뒤의 건물들만 없다면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었던 그 모습에서 축소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웠을 때는 근민현이라고 칭하였다가 이후 중수하여 사칠헌으로 고쳤다. 

치안과 군사 일을 보는 군관과 포교가 있으며 그 아래에 사령(使令)이 여러 일을 맡고 있는데 이들도 모두 이곳으로 출근하여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군현제는 백성에 대한 통일적 지배를 구현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유지했다고 하나 사람들의 삶은 세금제도를 제외하 일상생활은 비슷하였을 것이라고 상상이 된다. 

동헌 앞마당 왼편에는 피금각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작지만 화려한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정자처럼 넓은 대청마루 대신 1칸짜리 방을 만들었는데 인조 11년(1633)에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로 있을 때 지은 건물이다. 

김제동헌뒤로 군수가 머물던 내아가 자리하고 있다. 보통 파견을 나와 근무하게 되니 사저를 갖추어놓는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행정관리의 형태였다. 현재의 고위관료등에게도 사저가 제공되는 것과 유사하게 생각하면 된다. 옛 동헌에서는 행정과 사법이 한 곳에서 이루어졌으니 적지 않은 업무에 시달렸을 것이다. 피금각의 뜻은 ‘옷깃을 풀어 젖힌다.’로 동헌인 근민헌에서 종일 민원 판결에 시달린 군수가 이곳에서 옷을 벗고 쉬었다고 한다. 

유독 김제동헌의 내아는 대청이 낮았는데 마루가 낮은 이유는 내아를 찾아온 사람들이 문턱이 낮아야 편하게 수시로 오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업무가 끝난 이후에도 백성들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세안을 하고 몸가짐을 단장한 후에 동헌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업무를 시작하고 날이 저물면 피금각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내아에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행정구역 중 규모가 작지 않았던 군이었던 만큼 지금보다 건물이 많았을 것이다. 당시 부임되었던 군수들은 하루를 마감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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