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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22. 2021

정신을 담은 탑(塔)

서천 성북리 5층 석탑

최근에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시신을 화장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덤에 안치하였다. 무덤의 크기에 따라 그 지위를 알 수 있었기에 고분이나 왕릉을 보존해왔다. 사찰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탑은 원래 스님이 입적하게 되면 유골을 안치하는 용도로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가 입멸했을 때 시신은 다비(茶毘, 화장)했고, 유골은 여덟 부족에게 분배되었데 이때 부족들은 각각 탑(塔)을 만들어 그곳에 유골을 안치했다. 

서천에 가면 성북리 오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가장 충실하게 모방하여 만든 고려시대의 탑으로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던 시대의 양식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도 가지고 있는데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나 성북리 오층 석탑도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로 막아서 만들어두었다. 

스투파는 ‘유골을 안치하고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린 무덤’이라는 뜻으로 석탑을 말하는데 유골을 안치한 것을 탑이라 하고,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支提, ⓢcaitya)라고 했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 사찰이 있었는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지난 2007년에 있었는데 이곳 주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저 뒤편에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서 발굴조사는 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석탑보다는 목탑이 초반에는 더 많이 세워졌다. 다루기 힘든 석재보다는 목재가 더 많은 표현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일본에는 목탑이 많이 남아 있는데 조선의 목탑은 딱 하나 남아 있는데, 1605년(선조 38년)에 재건한 법주사의 팔상전뿐이다. 

서천 성북리 5층 석탑은 몸돌 위로는 지붕 받침을 올려놓았는데 부여에 가면 볼 수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처럼 별개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양끝을 보면 살짝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조물의 표현을 간소화시키면서 석탑의 양식, 즉 기단부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주는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기에 그 모양을 본딴 이 성북리 5층 석탑 역시 백제의 석탑 양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의 형식도 가지고 있는 성북리 5층 석탑은 목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발전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석탑 발달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만들어지게 된 고려시대에는 교세가 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불교적인 조영(造營) 작업도 거의 고려 일대를 통하여 국가적 혹은 개인적으로 되었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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