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삶의 마침표, 쉼표

갑작스럽게 찾아온 인연

매년 사과농사를 짓고 있지만 문경이 좋은 이유는 바로 공기가 좋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같이 농사를 지었지만 사과농장이 크지 않아서 조금만 바지런하면 사과를 재배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엄마의 말로는 사과농사가 무려 4,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그냥 빨간색으로 익어가는 사과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미 문경의 사과는 맛이 좋기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 엄마가 문경을 들어와서 오랜 시간 판로를 만들어 놓았기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올해로 22살이지만 기석이는 대학을 다니지는 않았다. 굳이 갈 필요성도 못 느꼈고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3년 전이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혼 후에 아빠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엄마는 형제자매가 없었기에 세상에 혼자만 남겨진 채 살았다. 그나마 이웃들이 조금씩 챙겨주는 것 외에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이지만 부엌과 방 두 개, 대청이 딸린 일본식 가옥과 닮아 있는 내 집도 있었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나서 대청마루에 앉아서 마시는 맥주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별다른 일도 생기지 않았고 생길일도 없었다. 변화라면 사과가 익어가고 익은 사과를 팔기 위해 문경새재를 나갈 때 정도의 변화랄까. 문경사과는 맛과 당도가 뛰어난 데다 오래 저장할 수 있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문경사과가 유명해지자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사과가 문경사과로 둔갑하는 일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날도 별다른 변화 없이 작은 사과농장으로 가서 나무에 병충해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이맘때쯤 개화한 꽃도 보고 착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주변에 있는 잡초도 뽑아주고 매일 확인하는 농업기술원의 정보도 확인해보았다. 언제 보아도 흰색 또는 연분홍색 꽃이 잎과 함께 가지 끝 잎겨드랑이에서 나와 우산 모양의 사과꽃은 다른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입구에 세워놓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사과농장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세가 아름다운 주흘산을 보면서 신북천의 옆을 지나가야 했다.


20여분쯤 걸리는 거리의 집에 도착해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대청마루에 처음 보는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집에 들어와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애도 자신을 보자 앉아 있던 대청마루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옆에는 두 개의 여행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기석이는 이 상황이 매우 어색했다. 둘이 서로 말없이 몇 분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기석 오빠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없는데 먼저 집에 들어온 여자애도 이상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낯설었다.

"저를 알고 있나요?"

"저도 오늘 처음 봤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제 아빠 이름이 송영래이고요. 서울에서 재혼했는데 저는 그 딸인 송지영이에요. 엄마는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고 아빠가 돌아가신 지 1주일이 되었는데 여기 주소와 배다른 오빠가 있다는 걸 알려줘서 온 거예요."

자신을 낳고 나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아빠의 딸이었는데 당당하게 이곳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이상하기도 했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라서 성인이 되면 그때 나갈게요. 아빠가 별로 남겨준 것이 없어서 이 세상에 기댈 사람이 오빠뿐이 없네요."

"그럼 태어난지도 몰랐던 배다른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달란 말이네요."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그렇다고 해서 무의도식은 하지 않을 거예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외에 오빠가 하는 일 도와줄게요."

"다른 사람의 도움은 별로 필요가 없는데... 혼자 지내는 것도 익숙해졌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우선 한 달만 같이 지내봐요. 그래도 안될 것 같은데 저도 다른 길을 찾아볼게요."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세상에 피붙이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주일 되었다고 했는데 그녀의 태도가 당돌한 것도 묘하게 끌림이 있었다. 아빠도 엄마도 삶의 마침표를 찍었는데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갑작스럽게 쉼표가 찍힌 것이다. 자신이라면 찾아가지 못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 남다른 모습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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