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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7. 2021

스님과의 인연

월인석보가 남겨진 1,000년의 고찰 구암사

서동과 선화공주로 잘 알려져 있는 백제의 무왕 37년 (서기 636년)에 숭제선사에 창건된 구암사는 오래된 이력을 가진 사찰이다. 대웅전 및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고 했으며 주산은 신령스러운 거북 모양을 닮아서 영구산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다가 오래간만에 스님과 긴 대화를 했다. 필자가 하는 일이 무척 궁금한 모양인지 다양한 것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보통은 사찰에 가서 스님을 만나면 사찰에 대해 알리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화인데 글 쓰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앞섰던 모양이었다. 

천년 고찰이라는 구암사의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구암사에 있는 월인석보 권 15는 세조 5년에 간행한 석가모니의 일대기이다. 순창 구암사에 발견된 월인석보 권 15권은 2000년에 발견되었다. 세조가 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간행하였을까. 

사찰의 규모는 작지만 차분한 느낌의 사찰이다. 조선 태종 때 중창하고 구암사라 개칭하였는데  사세(寺勢)가 점차 번창하여 전국 규모의 수도 도량을 이루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뒤 중건되어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널리 알려진 상언(尙彦, 1707∼1791)이 주석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피의 역사라고 하면 단언컨대 이방원과 수양대군 때일 것이다. 많은 핏줄이 희생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 조정의 역사의 물줄기는 바뀌었다. 특히 세조는 자신의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올랐던 것에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월인석보의 편찬 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구원받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업보를 지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삶은 자신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구암사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구암사의 현판을 비롯하여 백파와 주고받은 많은 서간(書簡)이 남아 있었으나 이들 현판과 서간은 6·25 때 절과 함께 모두 불타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나 자신에 대한 많은 가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관계의 뒤틀림이 일어난다. 모두가 쉽게 살고 싶고 쉽게 얻기를 원하지만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다.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스님과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절밥이나 차를 대접하고 싶지만 코로나19에 죄송하다는 말로 대신하자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무왕 때 최초로 세워진 이 사찰의 현재 모습은 1940년 일헌(一軒)이 중수하였고 1957년에 중건하였으나, 1959년에 다시 소실된 것을 1973년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고, 1997년 삼성각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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